‘장천(長川)’은 ‘기다란 개천’이라는 뜻으로 옛 우리말 이름인 ‘장사래말(마을)’의 한자식 표현이다. 1906년 장천리는 ‘여의리(如意里), 장천리, 독각리(獨脚里)’로 나뉘었다가, 1914년 다시 ‘장의리(長義里)’로 이름이 바뀌며 부천군 다주면(多朱面)에 편입되었다. 1937년 1월 15일 일본식 지명 대화정(大和町)으로 개칭되었다가 광복 후인 1946년에 가서 ‘숭의동’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숭의(崇義)’는 광복을 경축하며 옛 신령들을 숭상한다는 의미로 새로 만들어진 이름이다.
옛 지명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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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각다리 (독갑다리) | 외나무다리를 뜻하는 ‘독각(獨脚)’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옹기장수들이 많이 모여 살아 독을 사고 팔 때 주고받던 ‘독 값’이 독각으로 바뀌었다는 설이 전한다. |
여우실(여의실) | 이 동네에 자그마한 언덕들이 많아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
장사래말 | 동네에 뱀처럼 꼬불꼬불한 개천이 흘러 붙었다고 한다. |
도마교(道馬橋)는 ‘말이 지나다니는 다리’라는 한자 뜻이 아니라 국어학적으로 ‘산으로 건너가는 다리’ 또는 ‘산 주변에 있는 다리’ 정도로 해석된다. 화동(禾洞)은 예전 이곳에 논과 벼가 많아서 ‘베말(벼마을)’이라 불려 붙여진 한자 이름으로 ‘쑥골’이라고도 불렀다. 1914년 부천군 다주면에 편입되며 도마교의 ‘도’자와 화동의 ‘화’자를 따서 도화리(道禾里)가 되었다. 1936년 인천부에 다시 편입되고, 1937년 일본식 지명 앵정(櫻町)으로 개칭되었다가 광복 후 1946년 1월 1일 다시 도화동이 되었다.
옛 지명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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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다리 | ‘도마’는 순 우리말 ‘둠’ 또는 ‘두무’에서 비롯된 것으로 ‘주변이 산 등으로 빙 둘러싸여 있는 곳’ 또는 ‘우묵하고 깊숙한 곳’ 등을 이른다. 따라서 도마다리는 동네 앞에 수봉산이 있으니 그쪽으로 건너가는 다리나 산 주변에 있던 다리를 부른데서 유래한 것이다. |
베말(벼마을) | 논과 벼가 많아 농사를 많이 짓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
쑥골 | ‘쑥이 많은 곳’, ‘숯을 굽던 곳’, ‘물이 많은 골짜기’, ‘숲이 우거진 곳’ 등 여러 해석이 있지만, 중세국어에 ‘벼’를 대표로 모든 곡식을 가리키는 ‘쉬’에서 연원해 ‘쉬골>수골>숫골>쑥골’로 바뀌었다고 한다. |
주안은 ‘붉고 기러기 모양의 산’이라는 의미의 주안산(朱雁山)[현재 만월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일부 국어학자들은 산천에 제사를 지내는 ‘밝’ 사상에서 주안산(朱岸山)이 유래했다는 견해도 있다. 1914년 부천군 다주면에 편입되며 사미리의 ‘사’자와 충훈부리의 ‘충’자를 따서 사충리(士忠里)가 되었다. 1936년 인천부에 다시 편입되면서 간석동 일부와 관교동 일부를 편입하여 주안리(朱安里)가 되었고, 다음해 일본식 지명 주안정(朱安町)이 되었다. 광복 직후 주안동으로 개칭하였고, 이후 시가지 확장에 따라 분동을 거듭하여 현재의 주안 1~8동에 이르게 되었다.
옛 지명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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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말 | 고인돌이 있어 붙여진 마을 이름으로 고인돌은 사미마을의 너분바위를 의미한다(현재 주안동 고인돌). |
사미말[사미리] | 아름다운(美) 선비(士)가 나온 마을이라는 뜻으로 이조판서를 지낸 이헌경이 출생했다하여 갖게 된 이름이라 전한다. |
석바위말[석암리] | ‘석바위, 석암, 석촌, 석암동’ 등 마을에 커다란 돌바위가 있어서 유래된 이름이라 한다. |
솔안말(송내말)[송내촌(松內村)] | 솔안말은 술의 원료가 되는 누룩의 명산지였던 곳으로 능성 구씨들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또, 송내말은 마을 주위에 소나무가 우거져 있어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
신기촌 | 새로 터를 잡아 생긴 마을이라는 뜻의 ‘새터말’을 한자로 바꾼 지명 |
조선시대 인천부의 중심 동네이기 때문에 흔히 ‘읍내(邑內)’라 불렸고, 관아와 향교가 있던 ‘관청리’와 ‘향교리’라는 마을 이름에서 유래했다. 19세기말 관아 중심의 서촌(西村)과 향교 중심의 동촌(東村) 그리고 승기리(升基里)로 있다가, 1906년에 부내면은 구읍면(舊邑面)이 되고 서촌은 관청리(官廳里), 동촌은 향교리(鄕校里), 승기리는 대승기리와 소승기리로 각각 분리되었다. 1914년 부천군 문학면(文鶴面)으로 바뀌며 관청리와 향교리가 합쳐져 관교리(官校里)가 되었고, 대승기리와 소승기리도 승기리(承基里)로 통합되었다. 1940년에는 인천부에 다시 편입되며 관교리와 승기리가 합쳐져 원정(元町)이 되었다가 광복 이후 1946년 다시 관교동이라는 이름을 찾게 되었다. 1995년 12월 30일 인천도호부 관아와 향교 일대를 아우르던 관교동의 일부가 문학동에 편입되며, 현재 관교동은 옛 승기리 일대만을 아우르게 되었다.
옛 지명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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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청마을[관청리] | 조선시대 인천도호부 관아가 자리했기 때문에 생겨난 마을 이름이다. |
승기마을[승기리] | 한 때 없어졌다가 다시 이어서(承) 생긴 마을(基)이라는 데서 붙은 지명이라 전한다. |
향교마을[향교리] | 주변에 형성된 마을이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
관혁터 | 조선말기 군대에서 과녁을 놓고 사격연습을 시키던 터로, 과녁의 본딧말인 관혁이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전한다. |
넙적배미 | 비석거리 아래에 있던 논으로 모양이 넙적해서 붙은 이름이다. |
도깨빗골 | 관교동의 새텃말에 있는 골짜기, 음침하고 도깨비들이 많이 나타나서 붙은 이름이다. |
무지내고개 | 관교동에서 주안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연못과 샘물, 개울이 전혀 없어 붙여졌다 전한다. |
비석거리 | 산부리에 비석이 많이 서있어 붙은 이름이라 전한다. |
삼문거리 | 인천도호부 관아의 삼문이 있었던 거리라 붙은 이름이라 전한다. |
승깃들 | 옛 관교동 승기리에 앞에 있었던 들판을 말한다. |
옥(獄)다리 | 관청마을의 관아와 개울 건너 옥사를 이어주던 다리를 의미한다. |
문학동은 인천부의 남산(南山)이며 주산(主山)격이었던 문학산(文鶴山)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했다. ‘학(鶴)’의 고유어인 두루미는 ‘두르다, 둠, 두룸’과 같은 의미이고, ‘문(文)’은 옛 우리말에서 대개 ‘크다’의 뜻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문학산은 ‘두루미가 날개 편 듯 둘레를 광범위하게 에워싼 산’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것이다. 19세기말 현재 문학동 권역에는 산성리(山城里)와 남산리(南山里), 옛 관교동[현재 문학동 북부] 관할의 동촌과 서촌이 있었다. 1906년 부내면이 구읍면(舊邑面)이 되며 산성리는 그대로, 남산리는 학산리로, 옛 관교동 관할은 관청리와 향교리로 각각 이름이 바뀌었다. 1914년 부천군 문학면(文鶴面)으로 바뀌며 산성리와 학산리가 합쳐져 문학리(文鶴里)가 되었고, 옛 관교동 관할은 관교리가 되었다. 1940년 일본식 지명인 문학정(文鶴町)으로 개칭되었다가 광복 이후 1946년 1월 1일 다시 문학동이 되었다. 1995년 옛 관교동 일부가 문학동에 편입됐고, 1996년 3월 1일에 이르러 문학동과 관교동은 완전히 분동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옛 지명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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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산마을[학산리] | 학산은 문학산의 옛 명칭 중에 하나로 남산, 성산 등 여러 이름이 있다. ‘학산리, 남산리’ 모두 산 이름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한 것이다. |
산성마을[산성리] | 인근 문학산 정상에 산성(山城)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
양성말 | 문학산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양지바른 곳에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
산삿골 | 문학산 기슭 골짜기에 있던 마을인데, ‘산성’이란 말이 바뀌어 ‘산사’가 되었다고 추측된다. |
삼신우물골 | 문학산 골짜기에 있는 ‘삼신우물(산신우물)’에서 유래했다. |
삼탯골 | 문학산 동쪽 아래 있는 골짜기로 마치 ‘삼태기’를 앉혀놓은 것 같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전한다. |
도천현(禱天峴) | 학익동에서 문학동으로 넘어 들어가는 고개로 ‘도천이고개, 대천이고개, 도차니고개’ 등으로 불렀던 데서 유래한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제단인 ‘도천단(禱天檀)’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
수천현(水天峴) | 문학산에서 학익동으로 내려가는 길에 있던 고개로 기우제를 지냈던 제단이 있어서 붙은 이름이라 전한다. |
오히려 이곳은 조선 숙종 때의 학자 제운(霽雲) 이세주(李世冑, 1626~1710)가 은거했고, 인천부사를 지냈던 홍우순(洪祐順, 1791~1862)이 죽자 장사를 지냈다는 ‘제운리(霽雲里)’라는 마을 이름으로 오랜 기간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제운리, 노적산(리), 학익곡’ 등의 여러 자연 마을 이름으로 불리다가 1900년대 초 ‘학익리’라는 지명이 생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1937년 일본식 지명 학익정(鶴翼町)으로 개칭되었다가 광복 후인 1946년 1월 1일 다시 학익동이라는 이름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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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자골 | 문학산 골짜기 마을로서 옛날 진양 강씨가 모여 살았다고 한다. |
여우고개 | 학익동에서 문학산으로 가는 인적이 드문 고개에 여우가 있었다고 하여 붙어진 이름이라 전한다. |
제운말 | 숙종대 유명한 학자 제운(霽雲) 선생의 호를 따서 지은 마을 이름으로 꽤 오랜 기간 통용되었다. |
학(鶴)골 [합골, 햇골, 핵굴] |
‘학익곡’을 축약해 부르던 명칭이거나, 조개가 많이 났기에 ‘합골’로 불리다가 발음이 변해 ‘햇골, 핵굴’로 불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
삼해줏고개[삼호잿고개, 사모잿고개] | 삼호현(三呼峴) 또는 사모지고개라고 불리고, 삼국시대 중국으로 가는 백제사신을 배웅하러 나온 가족들이 별고개에서 이별을 나누고도 아쉬움에 여전히 서 있었는데 그것을 본 사신들이 큰소리로 세 번(三) 부르며(呼) 아쉬움을 달랬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 |
비랑이(비랭이)는 이곳이 바닷가 쪽으로 비탈진 땅에 있는 동네여서 붙여진 이름이고, 독정이(독쟁이)는 한자 뜻과는 관계없이 이곳에 장독과 같은 독을 만드는 곳이 많았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1906년 5월 인천부가 동리명을 개정할 때 독정리(讀亭里)와 비룡리(飛龍里)로 바뀌었고, 1914년 부천군 다주면에 편입되며 ‘용’자와 ‘정’자를 따서 용정리(龍亭里)가 되었다. 1937년 1월 15일 일본식 지명 일지출정(日之出町)으로 개칭되었다가 1946년 1월 1일 용현동이 되었다.
옛 지명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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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동말 | 옛날 글공부를 하던 글방이 있었던 마을로, 글씨를 쓸 때 사용하던 검은 먹과 붓을 상징해서 지은 마을 이름이다. |
약물터말 | 비랭이 서쪽에 있던 약물이 나오는 샘물이 있던 마을로, 이 약물의 효능이 좋아서 여러 가지 병을 고칠 수 있었다고 전한다. |
성촌말 | 창녕 성씨가 모여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
낙섬[원도] | 조선시대 원도(猿島)라 불리며 서해 여러 섬들의 신주를 모아와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현재 낙섬사거리 일대로 모두 매립되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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