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 다시 보기
인천에서의 역사시대는 비류백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이 시기의 사실을 전해주는 자료는 아주 희박하기 때문에 역사서나 기록을 통한 문헌사적인 연구는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다. 인천과 비류와의 관계는 기존의 역사서에 나와 있는 그대로 “주몽의 큰 아들 비류가 고구려에서 남하하여 인천 미추홀에 정착했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우리 민족의 역사가 동틀 무렵, 한반도 서해안지역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던 인천은 신석기·청동기시대를 거치는 동안 날로 새롭게 확장되어 기원전 1세기경에는 비류에 의해 ‘미추홀(彌鄒忽)’을 건설케 하는 기반을 이루었던 것이다. 백제가 국가를 세운 것은 기원전 18년으로 인천기(仁川紀)로 환산하면 올해 2022년은 2040년이다.
미추홀의 중심에는 문학산이 자리하고 있다. 문학산은 해발고도 217m, 동서 약 2.5km의 작은 산기슭으로 미추홀구의 문학동·관교동·학익동과 연수구의 선학동·연수동·청학동·옥련동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인천 사람들은 예로부터 문학산을 배꼽산이라고 불러 왔는데, 산봉우리의 봉화대(烽火臺)가 흡사 사람이 배꼽을 내놓고 누워 있는 형국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문학산은 일찍이 산성(山城)이 있어 성산(城山)으로, 고을 관아 남쪽의 남산(南山)으로 등재되었지만, 문학산이라는 명칭은 이미 17세기 한시(漢詩)에도 언급되고 있어 이전부터 불려진 것으로 보인다. 인천 향교의 문묘(文廟)와 학산(鶴山)이 더해졌던 것으로 보이며 이에 연유해서 1708년(숙종 34년) ‘학산’서원이 등장하게 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문학산 일대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쟁패 속에 부침을 거듭하다가 고려 왕조에 들어와 이 지역을 근거지로 해상무역으로 성장한 호족세력 인주이씨(仁州 李氏)와 함께 왕가(王家)의 고향으로 태어났다. 문종조에서 인종조에 이르는 7대 80여 년 동안 고려 왕실의 왕자·궁주 가운데 인주이씨의 외손 또는 생질이 아닌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칠대어향’(七代御鄕)으로도 기록된 인주이씨 시대가 펼쳐졌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이곳을 중심으로 인천도호부 관아와 향교가 섰고, 세종의 왕비였던 소헌왕후(王后) 심씨의 외가(外家)로 또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 윤씨의 외가로 마침내 1459년(세조 5) 인천군(郡)에서 도호부(都護府)로 승격하였다.
문학산은 인천과 나라를 지키는 호국의 산이었다. 문학산성의 봉수는 안산의 정왕산 봉수에 잇닿아 있고 다시 부평, 김포, 강화, 양천을 거쳐 한성의 남산에 이어지면서 조선시대의 군사적 통신수단의 역할을 담당했다. 임진왜란 때에는 인천부사 김민선(金敏善)이 옛 성을 수축하여 지키면서 여러 차례 왜적을 무찌른 기록도 있다. 양란(兩亂) 이후 문학산성이 지닌 전략적 중요성으로 인하여 이의 수축이 논의되어 왔다. 신미양요가 발발했던 1871년, 당시 인천부사 구완식의 조카 구연상이 기록한 『소성진중일지』(邵城陣中日誌)에는 총 48일간, 미국 전함의 종적과 문학산 진중에서의 전시체제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현대에 들어 9.15인천상륙작전 당시 월미도를 탈환한 이후 20:00경 수봉산을 점령하여 경인국도를 통제했고, 20:30경 문학산(233고지)쪽으로부터 인천 및 청색해안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길목에 차단 진지를 구축함에 따라 인천상륙작전을 완결할 수 있었다.
문학산성은 인천의 남쪽을 지키고 있으면서 서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어 유사시 생활근거지에서 입성하여 전술을 수행하는데 용이했고, 방어에도 유리한 군사적 요충지였던 관계로 예나 지금이나 서해안 방어의 주요 거점이었다. 1962년 미군기지가 들어선 것도 그리고 1979년 그들이 물러간 뒤에도 그 자리를 한국군이 이어 받게 된 것도 이러한 연유에 기인한다 하겠다. 1986년 문학산성이 인천시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고 2015년 일부나마 인천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오기까지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걸렸다.
인천역사의 발상지로 2천여 년 백제 건국 설화가 담겨져 있는 문학산에 대한 지속적 관심과 사랑은 인천의 정체성을 밝히는 의미이자 인천의 미래를 위한 방향제시라 할 것이다.
<우체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