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길을 가는 모습이 때로는 위대하게 투영되며 한편으로는 비겁한 처사로 매료되는 때도 있었다.
바로 시대에 따라 차이는 있어도 제자와 스승 그리고 선후배의 얽힌 과거 때문에 번번히 패배의식을 느껴서인지 유독 문단의 데뷔 즉 신문이나 문예지의 추천제도를 거부했던 이석인 시인이 그러한 유형이 아닌가 싶다.
한때는 미대를 다니며 그림에 심취하여 자기세계를 펼치는 가 했더니 기우는 가세와 주변조건에 의하여 군에 입대 결국 복학을 이루지 못한 한으로 남았던 이석인은 글 속에서도 이를 쉽게 찾아낼 수 있다. 굉장한(자칭) 휴머니스트적 사고론을 가지고 있다며 눈물 날 지경의 서정을 펼친 그는 뒷면을 들여다보면 비판적 요소가 꽉찬 또다른 포스트모던적 면이 있다.
5남매중 유일한 아들로 누나와 정신건강이 좋지 않았던 누이동생을 두고 무허가 이발사 아들로 생계와 학업의 두 잣대에 시달리며 뇌로 들어오는 사물과 사의의 표현은 자신도 모르게 달라져 온 것이 아닌가 한다. 항시 그림을 보는 눈 또한 합리적인 것 보다는 비합리적인 것에 열창을 했던 시인은 글에서도 그 본질적 거부의 싹이 트여 성장과 열매의 씨뿌림을 계속했던 것 같다.
1965년 영등포에서 군생활을 마친 성재(이석인 아호)는 선배들(조한길.손실향등)이 근무하는 인천신문사를 찾아 언론사에 몸담게 되었다.
후론 경기일보, 육영재단의 ‘어깨동무’, 서울신문, 동아일보, 소년동아, 그리고 ‘동아스포츠’에 몸담으며 문화부기자의 역량을 키우며 문인으로 무엇보다도 남길 좋아했던 그는 ‘경기문협’ ‘인천문협’을 위하여 아낌없는 뒷바라지에 심혈을 기울였다. 너무 빠른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작별하고자 했던 그. 상재된 시집으로 ‘산우가’(70년) ‘나무생각’ ‘고치속의 잠’(80년) ‘치통’(86년)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며칠동안 감지 않은 길게 자란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올리듯 / 웃자란 보리 순 처럼 질펀하게 누운 정원의 잔디에 가위를 댄다. <‘잔디를 깎다가’(중략)>
1986년에 상재된 ‘치통’속에 있는 작품으로 어렵게 마련한 주택(서예가 무여 신경히 선생과 일여선생이 건축한 주택)에 입주하여 생긴 앞 마당의 잔디를 깍으며 생성된 5연14행의 서사풍의 시다.
지금의 남구보건소 (옛 남구청)길에서 주안역으로 넘어가는 아주 작은 고갯마루 오른쪽으로 드는 길, 주안서로 29의22 아직도 빛바랜 문패가 남아있는 그 집이다. 잔디를 깎다가 아이들의 구슬이며 검게 녹슨 동전 그리고 옷장열쇠를 건져낸다고 했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자기의 얼굴의 잔주름 또는 수염을 깎으며 손에 미치는 전율을 생각하며 잔디를 깎는 모습에 대입, 그러나 시인의 역설은 여기에 있다.
“그런 전율보다 더 처연해서 내 마음을 늘 성가시게 하는 것은 응달에서 자란 노랗게 들뜬 잔디에 가위를 댈 수 없다는 사실이다” 라고 한 댈 수 없다는 역설 꼭 시인의 삶이 이렇게도 투영되고 있는 것이다.
수도국산에서 자라 남구 주안으로 이사한 후 줄 곳 남구터 지킴으로 마감한 시인은 인천의 지명을 시속에 녹아들게 했던 드문 시인이다.
전위적인 생각속에 또다른 이상을 찾고자 했던 이 시인의 관습이라면 신문사에서탈고를 마친후 곧바로 인천행 전철에 몸을 싣고 내린 주안역, 구 시민회관 쪽 지금도 잊혀지질 않는 ‘창고’ 라는 주점에 모여 글 이야기로 날 새는지 모르는 버릇 누군들 좋아했을까 하루도 거르지 않는 주붕(酒朋)들의 그 버릇이 그를 먼저 이승에서 저승으로 길 안내 했다고 할까.
인천에 문예지다운 문예지를 탄생케 할 소신있는 생각을 가지고 마음다졌건만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학산문학’에 남아 제대로 쉬고 있는지 궁금하다. 76호를 발행한 ‘학산문학’이 그의 얼굴로 다가오는 것은 그래서다.
이보게 성재형! 지금 살아있다면 70이겠네. 좋은 시 많이 썼는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