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기고

주안염전은 현재 수출공단으로 변해버렸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천일염전이 조성된 곳이다.
소금은 인간생활에 필수적인 식품으로 로마시대에는 군인의 급료를 소금으로 주기도 했는데, 봉급받는 직장인을 일컫는 ‘salary man’의 어원이 소금인 ‘salt’에서 유래된 것을 보면 소금의 사회경제사적인 의미가 컸음을 알 수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소금은 국가재정의 주요 수입원으로 재정 확보를 위해 전매제도를 채택하고 있었는데, 일제 역시 1906년 통감부를 설치하여 조선의 지배권을 강화하면서 일본에서 실시하던 연초와 소금에 대한 전매제도를 조선에도 이식해 재원확보에 주력코자 했다.
인천 개항 이후 인구가 증가하고 소금에 절인 음식물이 보편화되면서 청나라산 천일염이 수입되었는데, 조선 소금의 반 정도 싼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었기 때문에 수입은 계속 늘어나는 추세에 있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소금은 ‘민간인’이 주도해서 만든 자염(煮鹽)으로, 염도를 높게 한 바닷물을 큰 가마솥에 붓고 불을 때어 졸여서 소금을 생산했으므로 연료비나 인건비 등의 경비가 과다하게 지출되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천일염은 바닷물을 염전으로 끌어올려 바람과 햇빛을 이용하여 만드는 소금인데, 넓은 염전을 축조하기 위한 초기 비용이 많이 들 뿐 아니라 겨울철이나 우기에는 생산할 수 없는 기후적 제약으로 인해 조선 사회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번 만들어 놓으면 인건비 이외에 큰 투자없이 소금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따라서 통감부는 조선 내의 소금을 독점하여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으로 천일염전을 구축하여 값싼 천일염을 ‘관염(官鹽)’으로 생산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것으로 판단하게 되었다. 게다가 갯벌의 땅은 국가가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먹은 대로 천일염전을 개발하기가 용이했다.
1907년 통감부는 자국 일본 대장성의 조사와 자문에 기초하여 인천의 주안면 십정리에 중국인 기술자를 고용하여 최초로 시험용 염전 1정보(가로 세로 100미터 정도의 크기)를 축조했다. 주안 염전은 해안에서 육지로 깊숙하게 들어온 간석지로 소금생산의 최적지로 평가되었고, 생산된 소금을 소비할 수 있는 거대한 배후 시장과 신설된 경인철도 주안역은 신속한 물류가 가능한 입지 조건이었다.
실험결과 중국이나 대만보다 양호한 천일염이 생산됨에 따라 이를 토대로 1909년부터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1945년까지 4기에 걸쳐 경기도, 평안도, 황해도 등에 염전을 확대 준공했다. 광복 후 1958년경에는 우리나라 염전 총면적이 급속도로 늘어나 연간 10만톤의 소금이 과잉 생산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어 오히려 염전업자들은 적자 운영에 시달려야 했다.
정부는 보조금을 주면서까지 염전업자들이 스스로 폐염하도록 권장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1968년 우리나라 염전의 효시인 주안 염전은 공단으로 변했고, 1980년대까지 남동염전을 비롯한 인근의 염전들 역시 인천시의 새로운 도시개발 계획에 밀려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안타깝게도 남구 주안염전의 역사성은 사라지고 우리는 지금 다른 지역에 조성된 ‘소금박물관’을 보면서 옛 기억을 더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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