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인천은 비류의 미추홀 정착으로부터 2030년, 이름 탄생 600년이 되는 해이다. 인천 지명 탄생의 중심인 ‘남구’는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인천 역사의 근원인 여러 문화유산을 품고 있는 것이다.
고려시대 인천은 7대에 걸쳐 임금의 고향인 까닭에 7대어향(七代御鄕)이라 불렸다. 이 기간 동안 고려 왕실의 왕자, 공주 가운데 인주이씨의 외손 또는 생질이 아닌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지명도 경사의 원천이라는 의미인 ‘경원(慶原)’이었다. 조선 왕조는 고려 왕실과 밀접히 관련된 이 지역의 기반을 어떻게든 깎아 내려야 했다. 조선이 개창하자마자 ‘인주’로 환원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태종 13년(1413) 왕권이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가자 전면적인 지방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한다. 전 왕조의 유습을 없앤다는 의미와 함께 지방에 대한 국가의 일원적 통제가 필요했다. 그래서 실제의 인구수, 생산량, 크기 등을 대비하여 도호부, 군, 현 등으로 재편했고 지명에 ‘주(州)’ 자가 들어 있는 고을은 ‘주’자 대신 ‘산(山)’자나 ‘천(川)’자로 고치게 했다. 이 때 인천은 ‘군(郡)’ 정도에 해당함에 따라 인주에서 인천군으로 되었는데, 과천, 금천, 포천, 연천, 양천 등의 지명도 이 때 함께 탄생했다.
『세조실록』 5년(1459년) 11월 계미조에 인천 ‘군(郡)’을 자성왕비(慈聖王妃)의 외향(外鄕, 외가)이기 때문에 ‘도호부’로 승격한다고 명시되어 있고, 앞서 5년 10월 경술조에는 자성왕비 내향(內鄕)인 원평부를 파주목으로 승격한다고 하였다. 세조가 자성왕비의 친가와 외가를 승격하여 주나 부로 만들 것을 명령하였기 때문이었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는 강희맹의 「승호기(陞號記)」에 의하면, 인천의 명망 가문인 문씨(門氏)의 딸이 개국공신 심덕부에게 시집가서 청천부원군 심온(沈溫)을 낳았는데 이 심온의 딸이 세종비(世宗妃)였던 소헌왕후라 하여, 인천이 세종비의 외향임을 밝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천이 전통적으로 왕비의 내·외향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수양대군 세조에게 있어서 즉위 5년째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왜 이 해에 인천을 도호부로 승격시키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지만, 쿠테타로 집권한 이후 지속적으로 왕권을 강화시키려 했던 조치의 일환이었던 것은 틀림없다.
인천의 관아는 세종 2년(1424) 이전 군(郡)시절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관아 건축에서 국왕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객사가 제일 크고 화려하며 전망이 가장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데, 바로 그 옆방에서 사신의 술접대와 수청을 들었다는 것도 묘한 느낌을 준다. 동헌은 사또의 집무실로 객사의 동쪽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객사는 그 고장의 옛 이름을, 동헌은 시정 지침을 나타낸 당호를 각기 갖고 있다.
조선 왕조가 막을 내리면서 일제는 객사를 소학교 교사로, 동헌을 면사무소나 경찰서 등의 건물로 변경했는데, 조선 행정의 정통성을 말살시키기 위함이었다. 인천도호부청사 역시 문학출장소, 문학초등학교, 경찰관 파출소 등으로 사용되다가 2001년 이곳 승학산에 객사와 동헌을 비롯한 7개동으로 복원하였는데, 문학산과 함께 남구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라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