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막 남구청에서 근무할 때다. 유독 복지 대상자 한 분이 연락되지 않았다. 직접 주소지로 찾아가자 문이 빠끔 열리더니, 다시 휙 닫히려고 했다. 순간 이분을 꼭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문을 움켜잡았다. 그것이 그와의 첫 만남이었다. 정중히 들어가도 되느냐고 묻자, 그는 거부하는 태도로 말했다.
"네. 그런데 왜 오셨어요? 안 오셔도 되는데"
"힘들고 어려우실 텐데 어떻게 생활하는지 궁금해서요."
그의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따뜻한 목소리로 진심을 전했다. 그는 힘겹게 자신의 인생 여정을 풀어놓았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시작된 건 운동선수 출신인 남편의 음주와 폭행이었어요. 견디다 못해 이혼하고 세 아이와 살면서 기초생활수급을 받았죠. 그때 그 낙인감이란, 참 부끄러웠어요. 그것도 잠시 첫째, 둘째가 일하며 기초생활수급이 중지됐어요. 하지만 아이들은 벌이가 신통찮고 대출로 신용불량이 됐죠. 첫째는 주민등록이 말소됐고 둘째는 어디서 사는지 몰라요. 지금도 월세와 공과금이 밀렸고 지인들에게 돈을 빌려 사는데,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요. 자궁암 수술을 해서 일을 못 하거든요. 허리 통증, 무릎 관절, 다리 마비, 우울증, 무기력감 같은 후유증이 있고, 몸무게도 15kg 감소했고요. 죽을 맘도 몇 번 가졌는데, 그 충동은 여전해요. 그나마 중학생 아들이 실낱같은 희망이에요."
긴 이야기를 끝내고 덧붙였다. 찾아오는 게 부담스럽다고. 더는 할 이야기가 없다고. 하지만 내 귀에는 그의 완고한 거절이 도움을 원하는 간절한 외침 같았다.
일주일 후, 다시 방문했다. 나를 빚쟁이로 착각한 그는 깜짝 놀라며 맞이했다. 그래서 "남구청 사례관리자입니다"라고 하면 문을 열어주기로 했다.
"우리 막내는 초등학교 때 소아우울증과 ADHD로 고생했어요. 그때 나도 우울증을 치료했고요. 그 후 아들은 태권도로 병을 극복해 지금까지 학교 태권도부에서 활동해요. 나는 환청, 환시, 대인기피, 감정 기복, 불안감이 더 심해졌어요. 웃어야 할 때 울고, 울어야 할 때 웃는 이상한 행동까지 해요. 머리는 생각하는데, 행동하는 것이 힘들어요."
"제가 함께할 테니 천천히 극복해요. 좋은 친구 생겼다 생각하세요, 기다려 줄게요. 하지만 난 조력자, 중재자, 지지자일 뿐, 어려움을 이겨내려는 노력은 스스로 해야 해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뒤, 긴급지원을 신청하려고 그가 구청에 찾아왔다. 나는 놀랍고 기뻤다. 바깥세상을 거부하는 그가 용기를 내려면 긴 시간이 필요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발걸음을 떼며 움직였다.
곧 생계비가 지원되면서 밀렸던 공과금을 해결했다. 맞춤형급여를 제안했지만 자녀들이 연락되지 않아 필요한 서류를 받을 수 없었다. 이에 동주민센터(현 행정복지센터)와 협조해 조건부수급으로 책정받았다. 그러나 일하는 데 대해 신체적·정신적 질환으로 버거워했다. 병원 치료를 권유해도 망설였다.
그런데 몇 달 뒤, 그는 신경정신과에 다녀왔다. 약을 먹으니 잠도 잘 오고 불안감도 줄었다며 기뻐했고, 치료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근로능력평가용진단서와 진료기록지도 제출할 수 있게 됐다.
그의 집은 한국토지주택공사 긴급주택으로 10여 년 전 입주한 반지하 다세대 주택이었다. 집이 낡고 어두워서인지 그는 우울해했고, 창가로 사람이 지날 때마다 놀라곤 했다. 더 큰 문제는 여름에 폭우가 쏟아지면 화장실이 역류해 집 전체가 오물로 가득 차 숨 쉴 수 없었다.
한국토지주택공사에 민원을 제기하고 주택을 변경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변경이 필요한 증거 자료가 있어야 한다며 거절당했다. 그의 소망은 지상으로 올라가 사는 것이었다.
올여름, 폭우로 악몽이 되살아났다. 전기가 끊기고 전화가 불통됐다. 그는 오물을 퍼내며 또다시 절망했다. 임시 거처로 옮겨준다며 기관에서 찾아온 사람들은 집 안은 살피지 않고 엉뚱한 소리만 하는 통에 한바탕 울음을 터뜨렸다. 한 줄기 희망의 끈마저 날아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