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화동(道禾洞)은 구한말 인천부 다소면에 속해 있었는데 당시에는 베말(쑥골)과 도마다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1903년 인천부가 동네 이름을 확정할 때 도마교리(道馬橋里)와 화동이 됐고, 일제강점기인 1914년 도마동(道馬洞)과 화동(禾洞)의 첫 글자를 합해 도화리(부천군 다주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1936년 일제의 부역(府域)확장으로 다시 인천부에 편입되면서 앵정(櫻町)으로 개칭되었다가 광복 후인 1946년 도화동이 되었다.
 베말은 농사를 많이 짓는 벼 마을이라는 뜻으로 쑥골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렸는데 이것이 나중에 한자로 화동(禾洞)이 됐다. 우리 중세어에 벼를 대표로 한 곡식을 가리키는 말이 쉬였고, 이 쉬에 마을이나 골짜기를 뜻하는 우리말 골이 붙어 쉬골이 됐고 이것이 다시 수골>숫골을 거쳐 쑥골이 되었다.
 도마다리는 인천대학교 제물포 캠퍼스 일대가 옛날에 말을 방목하고 훈련시키던 곳이어서 도마(導馬)라는 이름이 생겼다가 이것이 다시 도마(道馬)가 된 것이라고도 하고, 지금의 수봉산 입구 일대에 말이 지나 다니는 다리가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고도 한다. 또, 도마를 둥글다 사방을 둘러싸다라는 뜻, 혹은  산을 나타내기도 했던 옛 우리말 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지명 연구에 의하면, 둠은 지금도 두메산골 두밀리 등의 이름에 그 자취가 남아 있고, 두마 두모 두미 도마 대마 두무 대미 등의 다양한 변형을 갖고 있는 말로 산(山) 뱀을 뜻하는 도마뱀의 도마나, 제주도 한라산의 원 이름인 두무악의 두무도 같은 뿌리로 해석된다. 그러므로 도마다리는 산으로 건너가는 다리로 해석되어 동네 바로 앞에 수봉산이 있으니 그곳으로 건너가는 다리였던 것이다.
이렇게 도화동은 쑥골과 도마리를 모태로 하는 마을이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제물포역 북쪽은 논과 미나리꽝이 면해 있었는데 그 논을 지나면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인천대학교 제물포캠퍼스가 자리한 도화산은 『조선지지자료』(1910)에 북망산(北邙山)으로 기록되어 있어 1930년대 중국인 공동묘지가 조성된 것이나 6ㆍ25전쟁 후에는 국군묘지가 조성된 사실이 우연만은 아니었다. 6ㆍ25전쟁 때 희생된 전몰장병 379위가 안치된 국군묘지는 1958년 옛 선인체육관 자리에 설치되어 1968년 서울의 국립묘지로 이장될 때까지 매년 현충일에 추념식이 열렸다. 도화동 일대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건 6·25전쟁 이후 피난민들이 자리를 잡으면서였는데, 두 마을의 뒤편으로 넓게 펼쳐진 구릉 위에 1965년 선인학원이 설립된 후 1979년 인천공과대학이 들어설 때까지 14개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가 자리를 잡으면서 교육의 중심지로 변모하였다.
현재 도화동은 도화1동과 도화2·3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화1동은 구도심 지역으로 수봉산을 중심으로 주택과 복합 상가가 밀집해 있고 제물포역, 도화역, 경인고속도로 도화I.C를 포함한 교통의 중심지이다. 도화2ㆍ3동은 인천대 제물포 캠퍼스를 비롯한 중ㆍ고등학교가 밀집된 교육의 중심지로 이곳을 배후지로 제물포역 북광장 주변에 상권이 형성되어 있다.
과거 인천 유일의 학산서원이 남구에 자리함으로써 정신과 사상의 기반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도화동 도화산 주변에 밀집한 학교들이 교육의 요람으로써 그 역사적 맥을 잇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