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세계대공황이 시작되자 일제는 경제적 위기를 타개할 유일한 출로로 전쟁도발에 더 한층 주력하였다. 1931년 만주를 침공·강점하고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을 획책해 가면서 조선을 대륙침략의 병참기지로 만들었다. 그리고 식민지 약탈을 더한층 강화하는 것과 함께 침략전쟁 수행에 필요한 군수공업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조선 중부에 위치한 수륙교통의 요지이자 정치군사적 중심인 경인지구를 공업 배치의 주요 대상지로 삼았고, 특히 침략군대의 소비물자를 현지조달하기 위하여 방직공업부문에 독점자본의 침투를 적극적으로 도모하였다.
제국제마주식회사(帝國製麻株式會社)는 1907년 동경에 본사를 두고 설립한 회사로, 마사(麻絲), 마면직물, 어망(漁網) 기타 마직유의 제조·가공·매매, 각종 마원료의 경작 및 이상 각 항에 부대하는 사업의 경영 또 차등의 사업에 투자함을 영업의 목적으로 삼았다. 제국제마회사가 조선에 진출하는 시점은 1920년 중반으로 추측되는데, 1926년경에는 마사의 판매점을 모집하는 광고를 신문에 내보내고 있었다. 1934년 5월 부산공장의 설립에 이어 1935년 7월 함경남도 풍산(豊山)에 제마원료공장을 신설하면서 사세가 확장되었다.
중일전쟁 이후 전시동원체제가 형성되면서 대규모 면방직 시설들이 군수시설로 전환되는 동시에 일본 내에 있던 설비가 폭격을 피해 조선으로 이설되고 있었다. 또한 제마(製麻)의 군수적(軍需的) 중요성이 증대되고 조선총독부의 아마(亞麻) 증산계획에 대응해서 제마방적종합공장의 건설이 요구되었다. 동아일보 1939년 7월 5일자에는 제국제마인천공장의 착공 소식을 담고 있는데 "부지는 인천부윤의 알선으로 4만5천평이고, 9월경에 착공하기로 총독부와 협의가 완료되었으며 제1기 공사는 내년 가을에 준공한다. 제마방적의 종합공장으로 완료 후에는 조선 최대의 제마공장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하고 있다. 학익동의 제국제마주식회사는 1940년 가을부터 생산에 들어가 군복과 천막, 로프, 군함 갑판의 덮개 등을 제작하였다.
공장의 진출과 함께 인천에는 많은 노동자들이 유입됐으며, 이러한 노동자들의 거주 문제가 대두됐다. 방직공장에는 여직공들을 위한 기숙사가 공장 내에 지어지기도 했는데 식당, 목욕탕, 요양소까지 갖추고 있었으나 기숙사만으로 노동자들을 감당할 수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공장은 공장 인근에 사택을 건설해 직원에게 공급했다. 사택은 공장이 지어진 다음 해인 1941년 31동 61가구 규모로 건립됐다.
공장 북쪽에 자리한 사택은 단독주택부터 집을 여러 채 붙여 기다랗게 지어진 연립주택, 공동 숙박을 위한 합숙소까지 다양했는데 전체 6등급으로 가장 큰 사택은 공장장 사택이 있었으며 다음으로 과장, 직원, 역원(役員), 공원(工員), 반도공원(半島工員) 순이었다.
2개의 단지가 2블록을 사이에 두고 동편은 조선인, 서편은 일본인을 위해 만들어졌는데 일본인 사택이 규모가 컸고 일본인 간부들을 위한 직원구락부도 함께 지어졌다. 현재 조선인 사택은 16가구, 일본인 사택은 3가구가 남아있다.
광복 후 일본인이 떠난 공장은 적산(敵産)으로 분류되어 국유화되거나 불하됐다. 1952년 동양방직(東洋紡織)은 제마공장을 흡수하고 염직 시설도 갖추어 거대 방직 공장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지만, 흥한방직(興韓紡織)과 한일방직으로 소유가 바뀌더니 1999년 공장이 폐쇄되고 이제는 엑슬루타워라는 거대한 아파트 단지로 변모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