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이 날개를 편 모양의 동네라는 이름이다. 문학산 일대는 학(鶴)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탄생했는데 선학(仙鶴), 청학(靑鶴 : 무학, 舞鶴) 등이 있다. 성산(城山) 또는 남산(南山)으로 불리던 문학산이 언제부터 명명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1708년(숙종 34) 인천부사로 재임 중 학문과 교화에 힘썼던 이단상(李端相)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한 서원이 사액(賜額)을 받음으로써 학산(鶴山)이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하고 있고, 여기에 인천 향교의 문묘(文廟)를 합하여 문학산이라 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문학산이라는 명칭은 이후 18세기 중엽(1757~1765)에 펴낸 『여지도서(輿地圖書)』 산천조(山川條)에 등장하고 있는데 이후부터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문학산 곁에서 제일 먼저 지명으로 등장한 것이 학익리로, 1903년이다. 1940년 왜식 정명(町名)인 학익정(鶴翼町)으로 불렸다가 광복 후 1946년에 학익동이 되었다. 청학동은 1914년에 청릉과 문학산의 이름을 따서 청학리가 되었는데 1940년 인천부에 편입되어 청학정이 되고 1946년에 청학동이 되었다. 선학동은 원래 도장리(道章里)지역으로 1940년에 인천부에 편입되어 무학정(舞鶴町)으로 개칭되었다가 1946년에 문학산 줄기인 선유봉과 문학산의 글자를 따서 선학동이 되었다.
학익동은 연수구 일대와 마찬가지로 지금은 완전히 내륙의 시가지가 되었지만 원래는 바닷가에 임한 경사 완만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선사시대 이래의 유적이 산포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학익동의 유구성을 알려주는 것은 학익지석묘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강화 지역 외에 학익동에 8기, 주안동에 2기, 문학동에 1기가 있었던 것으로 조사·보고되었듯이 산 아래 학 날개 안의 지역들은 인천에서 가장 먼저 도시화가 진행되었던 곳이다.
청동기시대 유물의 존재는 비류백제의 정착과 아주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이 지역은 조선 숙종 때의 교육자, 효자로 이름을 떨쳤던 부평이씨 제운(霽雲) 이세주(李世胄, 1626~1710)가 후학을 양성하면서 제운리로 더 잘 알려졌다. 연수구 동춘동에 그의 묘역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오랫동안 세거하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인천의 지지(地誌)에는 제운리라는 지명은 보이지 않고 있다.
1938년 3월 인천의 외곽지역에 속했던 이곳에 청소년 죄수를 수감하기 위한 소년형무소(현재의 인천구치소)가 문을 연 이래, 대륙병참기지로서 인천의 중요성이 강조되자 이곳은 갯벌 매립의 열풍에 휩싸이게 되었다. 1940년 5월 12일 동아일보는 일출정(용현), 학익정에 조성한 공장용지 70여만평 중 이미 60여만평이 일본 재벌에 의해 매각되었다는 기사를 싣고 있다. 광복 당시 수십 개 공장이 있었는데 일립제작소, 조선철강, 조선강업, 조선농사, 동양전선, 삼릉전기, 흥한방적, 조선농약, 고려철강 등이 눈에 띈다. 동양화학, 한국농약, 한일방적, 동양제철화학 등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이었다.
2002년 인천지방법원과 인천지방검찰청 청사가 이전 개원하고, 고층아파트가 즐비하면서 인구가 집중되고 번화한 동네로 변하고 있다. 세월은 많은 것을 상전벽해(桑田碧海)로 만들어 버리지만, 기구한 운명의 학익지석묘는 1971년 소년교도소가 확장되면서 자유공원으로 이전하였다가 다시 현재의 시립박물관 야외 전시장으로 옮겨져 있다. 학익동의 역사성을 찾는다면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놓는 방안도 모색해야 할 것 같다.
강덕우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