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건축물 문화재 지정 추진
 빨간 벽돌로 쌓아 올린 외벽, 파란색 뾰족 지붕. 네모난 일층 창문 위로, 다락방의 구조를 알리는 작은 창문과 서로 맞닿은 지붕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7채의 작은 마을. 현재 학익동 부지에 남아있는 극동방송국의 모습이다. 60여 년의 세월을 견뎌낸 극동방송은 글자 그대로 작은 마을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지금은 비록 용현-학익도시개발지구 속에 감춰져있지만 근대건축물 보존이 추진되면서 당시의 모습과 함께 존재가치 드러나고 있다.
 극동방송의 근대건축물 추진이 본격적으로 거론된 건 2011년이다. 처음부터 순탄하지는 않았다. 극동방송 부지는 1965년 학익동 일대 매립으로 들어선 OCI 소유였다. OCI가 공장 부지를 옮긴 후에는 재개발이 추진되면서 근대건축물 문화재 지정이 불투명해졌다. 그러나 각계에서 협의된 근대문화유산 지정과 문화예술창작공간 활용이라는 방안을 토대로 지난 1월, 철거가 아닌 보존으로 계획이 변경됐다.
  
선교사와 직원이 한돌한돌 쌓아올려
 극동방송의 역사는 톰왓슨(Tom Watson) 선교사로부터 시작된다. 미국 플로리다 주에서 상업 방송을 하고 있던 톰 왓슨은 한국 유학생에게 뜻밖의 제안을 받는다.
 1950년 8월 당시 유학생이던 강태국 목사는 톰 왓슨에게 한국에서 복음방송을 권한다. 
 이후 왓슨의 발 빠른 행보가 시작된다. 1952년 한국에 들어와 극동방송인 한국복음주의방송국을 준비, 학익동에 극동방송국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방송국 사옥과 부속건물, 선교사 사택 등 총 10동의 건물도 지었다. 1956년 12월22일, 송출을 하루 앞둔 윈첼 선교사의 일기에 방송국 완공이 있기까지 힘든 여정이 적혀있다. 전쟁의 흔적이 채 가시지 않는 한국의 겨울은 유난히 춥다. 얼어붙은 개펄을 헤치면서 안테나 공사를 하다 보니 피부는 늘 갈라 터지고 기침이 멈추질 않는다. 드디어 내일 첫 방송이 송출된다. 해외에 첫 송출될 방송국이 서울이 아닌 인천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극동방송 창사 30주년을 기념해 지난 1986년 한국을 찾은 톰 왓슨 초대 국장은 그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전했다.
 이후 왓슨의 발 빠른 행보가 시작된다. 1952년 한국에 들어와 극동방송인 한국복음주의방송국을 준비, 학익동에 극동방송국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방송국 사옥과 부속건물, 선교사 사택 등 총 10동의 건물도 지었다. 1956년 12월22일, 송출을 하루 앞둔 윈첼 선교사의 일기에 방송국 완공이 있기까지 힘든 여정이 적혀있다. 전쟁의 흔적이 채 가시지 않는 한국의 겨울은 유난히 춥다. 얼어붙은 개펄을 헤치면서 안테나 공사를 하다 보니 피부는 늘 갈라 터지고 기침이 멈추질 않는다. 드디어 내일 첫 방송이 송출된다. 해외에 첫 송출될 방송국이 서울이 아닌 인천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극동방송 창사 30주년을 기념해 지난 1986년 한국을 찾은 톰 왓슨 초대 국장은 그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전했다.
 "방송사 위치는 내가 플로리다에 있을 때 엔지니어에게 배운 것인데, 염분이 있는 바다에 안테나가 있으면 강력한 전파를 송출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미국에서는 서울보다 인천이 더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건립 과정은 당시 극동방송에 근무했던 직원들의 회고록을 토대로 유추할 수 있다. 극동방송에 가장 먼저 입사한 한용석씨는 건설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미국 선교사들이 방송국을 짓는다고 하기에 (중략) 안테나를 세울 때는 소가 쟁기를 끌면서 개펄을 파서 동선을 묻었습니다."
 한씨에 이어 극동방송에 들어와 처음 집을 지었다는 김찬수(1956년 3월 14일)씨와 김인득씨(1956년 7월 17일)씨의 "입사 당시 송신소 건물과 사택 세 채는 이미 완공되어 있었고 (중략) 계속해서 집을 지었다"는 회고는 모든 건물이 선교사와 직원들의 힘으로 건설됐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대 흐름에 맞는 공간으로 활용
 학익동 극동방송국의 규모는 총 10채였다. 68평 규모의 송신소와 사무실, 선교사들의 사택 등이 60여년이 흐른 지금에는 사옥과 선교사들의 사택 7채 등 총 8채가 남아있다. 보존 형태 또한 초기의 작은 정원과 원형 교차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학익동의 극동방송국은 당시의 불편한 교통편으로 인해 1962년 7월 북성동(자유공원)으로 주소를 옮긴다. 이후 그 자리에 OCI 인천공장이 들어서면서 극동방송국에 대한 기억도 차츰 사라졌다. OCI는 건물이 낡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철거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워낙 견고한 상태라 노조사무실과 간부직원 숙소로 활용, 그대로 사용하게 됐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산업유산의 가치를 지닌 근대건축물의 또 다른 활용방안이다. 검토 중인 방안은 극동방송 자리에 시립미술관 또는 문화예술인들의 공동작업장과 창작 공간조성이다. 전문가들은 유동인구를 끌어들일 수 있는 지리적 장점을 이용하면서 극동방송국을 역사를 지닌 기념물로 남기기보다 역사적 가치와 시대의 흐름에 맞춰 지역 주민과 소통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하는 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전했다.
황경란 명예기자
황경란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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