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구 학익동에는 지금은 없지만 1990년대 초까지 조선 후기 문인으로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지낸 홍우순(洪祐順:1791~1862)의 묘비가 있었다. 제2경인고속도로 건설과 뒤이은 연경산 일대에 공원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성석동 889번지 풍산 홍씨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다행히 1949년 시립박물관 이경성 관장의 주도로 인천의 고적들을 조사할 때 비문 내용을 필사해 둔 것이 전하고 탁본 한 벌도 남아 있어 60여 년이 지난 지금, 그 흔적만이라도 되새겨 볼 수 있는 자료이다. 
홍우순은 순조 25년(1825) 전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 홍문관 교리, 사헌부 장령, 강원도 관찰사,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는데, 신도비에 나와 있듯이 그의 묘가 제운리(현 학익동)에 있었다.
신도비(神道碑)는 사자(死者)의 묘로(墓路)로 알려져 있는데, 신령의 길(神道)인 무덤 남동쪽에 남쪽을 향하여 묘 앞에 사람의 삶을 기록하여 세운 비를 말한다. 중국에서 한나라 때 처음 세웠다는 설이 있다. 처음에는 모제(某帝) 또는 모관신도지비(某官神道之碑)라고만 새겼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이전부터 있었지만 거의 망실되고 고려시대《동문선(東文選)》 등의 문집에 비문(碑文) 형태로 전한다. 조선 시대에는 신도비가 태조의 건원릉신도비와 세종의 영릉신도비 등 초기 왕릉에만 있고, 이후에는 국왕의 사적은 실록에 기록된다는 주장에 따라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다. 반면 많은 사대부들은 신도비를 세웠는데, 실제 관직이나 사후에 추증된 관직으로 정2품 이상인 경우에 세울 수 있었다. 비의 크기는 높이가 4척 정도부터 7~8척 되는 큰 비까지 있다.
홍우순의 비는 기단 위에 오석(烏石)의 비신과 화강석 옥개석을 얹은 것으로 크기는 전체 높이가 290cm이고, 비신은 높이 196cm, 폭 105cm, 두께 33cm의 양면비이다. 전면에는 아들 가의대부공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 홍승조(洪承祖)가 짓고(撰), 손자 가선대부호조참판 겸 동지경연성균관사원임홍문관부제학 홍원식(洪遠植)이 썼으며(書), 생질 통정대부 이조참의 청송 심동신(沈東臣)이 새겼음(篆)을 전하고 있다.
신도비의 내용을 보면, 휘는 우순(祐順), 자는 이백(耳伯)이고 호는 성산(城山)이었다. 풍산 홍씨의 가계는 고려 직학인 홍지경(洪之慶)과 사인 홍간(洪侃)이 문장으로 유명하였으며, 조선 개국 초기에 고양에 은거하면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홍우순의 관력 및 행적, 부인의 가계(家系)와 인품, 공조참판을 지낸 홍승조, 차남 홍승기(洪承祺), 삼남 홍승유(洪承裕) 등 3명의 자식들과 손자로 이어지는 계보(系譜) 및 홍우순의 인품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뒷면에는 그가 철종 13년(1862) 2월 72세로 별세하였으며 그 해 4월 인천부 제운리 서남쪽 평원을 등진 곳에 장사지냈음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마무리에는 그를 추모하는 시문을 새기고 조선 고종 16년(1879) 5월에 비문을 세웠음을 밝히고 있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아 안타깝지만, 남구의 오랜 역사성을 보여주는 귀중한 하나의 흔적이다. 현재 인천에는 서구에 심즙(沈?), 심우정(沈友正), 심유(沈攸) 및 한백륜(韓伯倫) 신도비와 남동구에 조정만(趙正萬), 이여발(李汝發) 신도비, 강화도에 황형(黃衡), 정제두(鄭齊斗) 신도비만이 남아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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