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교육/인물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국가보훈처를 비롯한 전국의 지자체, 보훈단체에서 독립·호국·민주화 과정에서 나라를 위해 희생하고 공헌한 분들을 기리기 위한 행사가 집중적으로 열린다. 인천에서도 제62회 현충일을 맞아 수봉공원 현충탑 앞에서 수봉공원 현충탑의 역사를 찾아서라는 주제로 추념식이 열렸고, 오후 같은 장소에서 한국전쟁 참전용사와 재일학도의용군 642명을 기리는 제15회 현충재도 봉행되었다.
본지 지난 5월호의 수봉산의 유래와 현충탑에서 언급했듯이 수봉산은 물(水)과 관련된 지명 유래에서 수봉산(壽鳳山)으로 변모했는데, 1972년 정상에 현충탑 건립을 계기로 호국 영령을 기리는 기념물들이 연이어 설치되며 새로운 한자 이름을 얻었다고 여겨진다. 6월의 의미를 되새기며 그 남은 이야기를 이어나가보겠다.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에 거주하는 교포 사회에도 소식이 전해졌다. 당시 재일교포 사회는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반목을 거듭하고 있었는데, 조국이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일본 전역에서 모여든 재일교포의 자녀 및 유학생 1,000여명은 주일대표부에 조국 수호를 위하여 참전하겠다는 뜻을 전하였지만, 주일대표부와 미국 극동사령부는 이들은 병역의무가 없어 참전할 수 없다는 방침이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조국을 위해 꼭 참전하겠다는 탄원서를 내는 등 적극적인 교섭 끝에 642명이 미8군에 편입되어 참전 할 수 있었다.
이들은 불과 1~2주간의 짧은 훈련을 마치고, 1950년 9월 중순 1진 76명이 투입된 이후 몇 차례에 걸쳐 한국에 들어왔다. 재일학도의용군은 미군과 국군 부대에 수십 명 단위로 흩어져 인천상륙작전, 평양입성, 압록강 해산진 전투, 백마고지 전투 등에 참여했다. 이들 642명 중에 52명은 전사했고 83명은 행방불명 처리되었으며, 265명은 일본에 귀국하였으나 242명은 일본이 무단출국자로 규정해 입국을 거부하여 조국에 남았다. 그러나 이들이 마주한 것은 조국 수호의 영웅이 아니라 반일 감정을 앞세운 냉대와 생계에 대한 걱정이었다.
때문에 이들에 대한 추모 역시 1959년 6월 28일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52명의 유골을 안치할 충혼탑과 납골탑이 일본 동경에 건립된 것이 처음이었다. 한국에서는 1956년 재일학도의용군 동지회에서 처음 조국의 땅을 밟은 월미도에 기념비를 세우고자 하였으나 무산되었고, 1976년에 와서야 서울 현충원에 재일학도의용군 위령비가 건립되었는데, 재일교포들의 모금에 의한 것이었다.
이윽고 1979년 10월2일 수봉공원에 4백여 평의 대지를 마련하여 높이 8m의 석재 조형물과 청동군상으로 된 재일학도의용군 참전비를 건립하였다. 이날 제막식에는 최규하 국무총리 등 6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고, 참전비 문구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휘호가 새겨졌다. 1982년 11월1일 참전비 앞에 다시 재일학도의용군 명비(銘碑) 및 연혁비가 세워져 제막식이 열렸는데, 여기에는 참전자 전원의 이름과 참전 연혁이 새겨졌다. 현재 재일학도의용군은 한국에 20여명, 일본에 10여명이 생존해있고, 매년 9월에 국내외에 거주하는 동지회 회원들이 수봉공원 현충탑 앞에 모여 기념행사를 갖고 있다. 1967년 중동전쟁 당시 해외체류 이스라엘 유학생들이 귀국해 참전한 일이 조국애의 표상처럼 회자되는데, 이보다 앞선 일이라 하겠다.
수봉공원을 찾을 때 무심코 지나치는 조형물의 하나일 수도 있겠지만, 6월만큼은 나름대로 호국보훈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을 한 번쯤은 가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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