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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에 의하면 기원전 1세기 고구려 첫 왕후 소서노(召西奴)의 아들 비류(沸流)는 주몽(朱蒙)의 친자 유리(類利)가 태자에 오르자 다가올 시련을 예견하고 어머니 서소노와 동생 온조(溫祚)와 함께 고구려를 떠나, 인천에 정착하여 문학산(文鶴山)에 성을 쌓고 미추홀(彌鄒忽)이라 명명한다. 이것이 인천의 최초 명칭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때 문학산 정상 해발 224m의 산정부를 흙으로 쌓은 내성과 산 정상 부위의 가파른 자연 지형을 이용해 외성을 돌로 축성한 테뫼식(산 정상을 둘러쌓은 성) 석축산성이 문학산성(文鶴山城)으로 지금까지 미추홀의 존재를 증명해주고 있다.
이 산성은 처음에는 토성이었으나 삼국 말 또는 통일신라를 거치면서 석성으로 개축되었고 이것이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비류와 미추홀의 옛 성으로 기록된 이 산성은 비류정(沸流井)이라는 우물을 갖추고 있었고, 성내에는 봉수대(烽燧臺)가 있는데 인천 사람들은 예부터 어머니로부터 생명을 이어받은 흔적이라 할 수 있는 봉수대를 사람이 배꼽을 내놓고 누워 있는 듯하여 배꼽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에는 인천부사(仁川府史) 김민선(金敏善)이 이 곳 산성에서 여러 차례 왜적을 무찌른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이와 함께 문학산 사모지고개를 넘어 학익동 방향으로 내려가다 보면 조선 숙종때 건립되어 나라에서 그 권위를 인정해준 인천 유일의 서원 있는데 이것이 바로 학산서원(鶴山書院)이다. 당시에 건립된 학산서원은 인천부사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고 주민교육에 공이 컸던 이단상(李端相)을 기리고 후진양성을 위해  인천지방 유림들이 왕에게 청원상소를 통해 건립된 서원으로, 인천 지역의 학문과 교육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해오다가 고종의 서원철폐정책에 따라 훼철(毁撤)된 이후 지금까지도 재건되지 못하고 문학산 끝자락에 단지 학산서원의 터임을 알리는 표지석만이 외롭게 이 곳을 지키고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남구청이 지난 2004년 인천시립박물관의 도움을 얻어 이곳 학산서원터 자리를 찾아 표지석을 세우고, 2009년부터 2년에 걸쳐 문학산성 일부에 대한 보수공사를 실시하는 등 인천 역사의 복원을 위하여 꾸준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2천년 동안 인천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문학산의 모습은 지금 어떠한가?
안타깝게도 지난 1959년 문학산 정상에 미군기지 결정과 함께 이듬해부터 문학산성의 봉수대와 비류정 등 정상부를 헐어내는 작업을 진행하여 1962년부터 이곳에 미군 기지가 들어선 이래로 아직까지도 군부대가 주둔해오고 있다. 이 때문에 과거 인천 백성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적을 물리쳤던 문학산성(文鶴山城)의 위용은 사라지고, 문학산 주위에는 재개발·재건축사업과 함께 비류(沸流)가 도읍으로 정한 이 일대에 대한 우리의 소중한 유물과 유적이 파괴되고 있으며, 발굴의 기회마저도 잃어가고 있다.
이제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부터라도 백제 건국의 흔적이 남아있는 문학산성(文鶴山城)과 학산서원(鶴山書院) 등 2천년 우리 인천 역사의 뿌리를 찾아 복원하고 보존하는 일에 우리 남구가 중심이 되어 인천 역사문화도시 남구로 거듭나길 학수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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