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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5월 연안부두 일대에서 서해안풍어제가 열릴예정이다.
팔순을 넘긴 나이지만 올해도 역시 김금화 선생이 풍어제를 주도한다.

서해안풍어제는 중요무형문화재 제82-나호로 서해안 대동굿과 배연신굿이 한 종목으로 묶여 있다. 대동굿은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마을굿이고, 배연신굿은 선주의 개인 배굿으로 사공들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굿이다. 배연신굿은 바다 한가운데 배위에서 펼쳐진다는 것이 특징으로 내용과 규모가 대동굿에 버금간다.

이렇게 큰 굿을 이끄는 사람은 올해 82세의 만신 김금화 선생이다. 국가대표 무당이라는 뜻의 ‘국무’라는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이다. 그녀는 12세에 무병을 앓다 17세에 무당이었던 외할머니에게 내림굿을 받았다.

그 후 2년 동안 굿을 배운 뒤 19세부터는 혼자 대동굿을 맡아 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도 또 무속인으로도 평탄한 세월을 보내지는 못했다. 혹독한 시집살이와 무당이라는 이유가 그녀의 결혼생활을 무너뜨렸고, 시대적 분위기가 무당의 삶을 옥죄던 때도 있었다.

“옛날에는 무당의 삶이 다 그랬지. 인민군들은 미신 행위 한다고 난리를 쳤고, 살아남으려고 어쩔 수 없이 했던 행동들이 나중에는 빨갱이짓이라고 표적이 되기도 했어.”
사는 게 고통스러워 다른 일을 해 본 적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다시 자신에게 정해진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시대의 변화는 힘겨운 외길인생에 단비를 내려주기도 했다. 1982년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 문화사절단으로 미국에서 공연을 하면서 핍박받던 무당이 무속 예술가로 대접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계획된 공연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영사관에서 ‘나라망신’이라며 무대를 막아서기도 했단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무대에 올라 작두도 타고 신명나게 굿판을 벌렸더니 6천여 명의 관객이 기립박수를 치고 환호했다. 무대 위로 올라와 함께 춤을 추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해외에서 첫 선을 보인 한국의 굿 공연은 관객들의 호응에 힘입어 26일 동안 이어졌다. 이를 계기로 선생의 굿 실력은 전 세계에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일본, 호주, 독일, 러시아 등지에서 공연과 방송 출연 요청이 이어졌다. 세계가 인정한 무속인에 대한 국내의 관심도 높아졌다. 2007년에 자서전 ‘비단꽃 넘세’가 출간됐고, 2011년에는 다큐멘터리 ‘비단꽃길’이 제작됐다.

또한 선생을 따르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선생의 신딸은 80여 명이나 된다.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채희아씨와 독일인 안드레아씨는 현재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서해안풍어제의 맥을 잇겠다고 찾아오는 이들도 많다. 현재 주안 6동에 위치한 서해안풍어제 보존회사무실에는 20여 명의 전수자들이 교육을 받고 있으며, 이수자도 15명이 넘는다.

큰 굿을 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이 버겁지 않느냐는 질문에 선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도 매일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납니다. 새벽 5시가 되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운동을 가죠. 굿을 하려면 체력이 좋아야 해요.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할 수 있을 때까지 항상 혼신을 다해 노력할 겁니다.”
앞으로도 그녀의 신명나는 굿판이 오랫동안 계속되기를 바란다.

유수경 기자, 오는 5월 연안부두 일대에서 서해안풍어제가 열릴예정이다.
팔순을 넘긴 나이지만 올해도 역시 김금화 선생이 풍어제를 주도한다.
서해안풍어제는 중요무형문화재 제82-나호로 서해안 대동굿과 배연신굿이 한 종목으로 묶여 있다. 대동굿은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마을굿이고, 배연신굿은 선주의 개인 배굿으로 사공들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굿이다. 배연신굿은 바다 한가운데 배위에서 펼쳐진다는 것이 특징으로 내용과 규모가 대동굿에 버금간다.
이렇게 큰 굿을 이끄는 사람은 올해 82세의 만신 김금화 선생이다. 국가대표 무당이라는 뜻의 ‘국무’라는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이다. 그녀는 12세에 무병을 앓다 17세에 무당이었던 외할머니에게 내림굿을 받았다. 그 후 2년 동안 굿을 배운 뒤 19세부터는 혼자 대동굿을 맡아 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도 또 무속인으로도 평탄한 세월을 보내지는 못했다. 혹독한 시집살이와 무당이라는 이유가 그녀의 결혼생활을 무너뜨렸고, 시대적 분위기가 무당의 삶을 옥죄던 때도 있었다.
“옛날에는 무당의 삶이 다 그랬지. 인민군들은 미신 행위 한다고 난리를 쳤고, 살아남으려고 어쩔 수 없이 했던 행동들이 나중에는 빨갱이짓이라고 표적이 되기도 했어.”
사는 게 고통스러워 다른 일을 해 본 적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다시 자신에게 정해진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시대의 변화는 힘겨운 외길인생에 단비를 내려주기도 했다. 1982년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 문화사절단으로 미국에서 공연을 하면서 핍박받던 무당이 무속 예술가로 대접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계획된 공연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영사관에서 ‘나라망신’이라며 무대를 막아서기도 했단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무대에 올라 작두도 타고 신명나게 굿판을 벌렸더니 6천여 명의 관객이 기립박수를 치고 환호했다. 무대 위로 올라와 함께 춤을 추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해외에서 첫 선을 보인 한국의 굿 공연은 관객들의 호응에 힘입어 26일 동안 이어졌다. 이를 계기로 선생의 굿 실력은 전 세계에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일본, 호주, 독일, 러시아 등지에서 공연과 방송 출연 요청이 이어졌다. 세계가 인정한 무속인에 대한 국내의 관심도 높아졌다. 2007년에 자서전 ‘비단꽃 넘세’가 출간됐고, 2011년에는 다큐멘터리 ‘비단꽃길’이 제작됐다.
또한 선생을 따르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선생의 신딸은 80여 명이나 된다.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채희아씨와 독일인 안드레아씨는 현재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서해안풍어제의 맥을 잇겠다고 찾아오는 이들도 많다. 현재 주안 6동에 위치한 서해안풍어제 보존회사무실에는 20여 명의 전수자들이 교육을 받고 있으며, 이수자도 15명이 넘는다.
큰 굿을 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이 버겁지 않느냐는 질문에 선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도 매일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납니다. 새벽 5시가 되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운동을 가죠. 굿을 하려면 체력이 좋아야 해요.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할 수 있을 때까지 항상 혼신을 다해 노력할 겁니다.”
앞으로도 그녀의 신명나는 굿판이 오랫동안 계속되기를 바란다.

유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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