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평 정도의 방에는 눈 돌리는 곳이 모두 그림으로 도배하다시피 되어 있어 이곳이 그림쟁이 공간임을 보여주고 있다. 유채밭이 한없이 펼쳐지는가 하면 농익은 감이 주렁주렁 달린 가을 정경이 이어지고 어느 순간 개구쟁이 소년의 얼굴이 장난치듯 웃고 있다. 그림 속 풍경이나 얼굴들은 밝고 경쾌하고 느긋하다.
임 화백이라는 호칭이 자기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며 그냥 이름을 불러달라고 한다. 화백이란 경륜과 연륜이 켜켜이 쌓여 사회적으로나 작품적으로나 높은 위치에 오른 분들을 지칭한다며 자기는 그 출발점에 서 있는 아마추어라고 머쓱해 한다. 기자와 반씩 양보해 임 작가라고 부르기로 협상하고 데이트를 시작했다.
공고를 졸업할 무렵 회사에 취업을 나가 일하던 중 오토바이 사고를 당해 전신마비 장애가 왔다. 그 후 17년이라는 긴 시간을 누워서만 지내던 그에게 같은 아픔을 가진 주변 동료나 선배들의 사랑과 관심이 지금의 그림쟁이 임경식을 있게 했다.
사고 후 병원에 있을 즈음, 담당의사로부터 비슷한 사람들끼리 격려하며 서로 힘이 되어주는 모임을 결성하면 어떻겠냐는 권유로 결성된 전신마비장애우 모임 ‘정상회’는 16년 째 이어오지만 한 달에 한 번꼴로 가는 서울이 그에겐 멀기만 하다.
또 한 사람, 그의 지난한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아버지다. 작년 어머니가 작고하고 현재 단 둘이 살고 있는 칠순 넘은 아버지는 그의 수족이면서 가난한 경제적 지원자다. 경제적 활동이 전무한 그에게 그림에 필요한 도구를 구입하는 비용은 만만치 않다. 물감이나 붓 이젤 등 가격이 비싼 재료들은 기초수급 수당과 장애 수당으로는 물감 값도 대기 힘든 처지다.
임 작가는 자신의 몸은 손가락 하나 맘대로 움직일 수 없지만 앉아서 입을 통해 할 수 있는 것은 능란하게 해치운다. 붓 대신 입에 문 긴 막대는 컴퓨터 키보드를 자유자재로 눌러 세상과 소통하기도 하고 누군가 찍어온 디지털 카메라를 통해 가보고 싶은 곳을 화폭 위에 옮겨 놓는다.
취미로 무엇을 한다는 사람들을 보면 그는 부럽다고 한다. 자기에게 그림이란 삶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경제적 활동으로 이어가기 위한 피나는 직업훈련이란다. 때문에 처음에는 조바심을 내기도 하고 짜증을 내기도 하고 우울에 빠지기도 했지만 지금은 자기 콘트롤을 통해 느긋한 마음으로 연습한다고 했다. 그 이면에는 연세 많은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자립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포함됐다.
지금까지 3번의 그룹전에서 관람자들이 호평을 해 줄 때는 몸둘 바를 모르겠으나 그런 보람이 그림을 계속하게 한다. 첫 개인전의 감동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하루 대부분을 의자에 앉아 보내는 그에게 가장 힘든 것은 욕창이다.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 힘을 줘서 말해야 하기 때문에 기력도 빨리 소진된다. 몸의 방향을 자주 틀어주어야 하기 때문에 일주일에 닷새 오는 활동보조인의 도움은 그야말로 천상의 손길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대화하는 내내 밝았다. 자신의 삶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산다고 했다. 종교적 힘도 그를 웃게 해주는 원동력이라고 했다.
밝게 웃는 그에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사고 당시 날마다 집으로 찾아와주는 친구들을 외면하고 배척했던 일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발길이 끊긴 친구가 그립거나 말상대가 절실할 때 그 당시 세상과 문을 닫아버린 자신이 후회스러울 때가 많다. 유독 친구와 운동을 좋아했던 학창시절을 떠올리면 만감이 교차한다고 말한다.
작은 그림 하나를 완성하는 데 대략 열흘 정도 걸린다. 물감이 뻑뻑해서 붓을 입에 물고 한 시간만 그리고 나면 입과 목, 어깨 등이 아프다. 하지만 열심히 그려서 훗날 자신만의 개인전을 갖는 것이 꿈이라며 고통을 참아낸다. 전문가가 인정하는 숙련된 그림도 중요하지만 일반인들에게 위안과 희망의 메시지가 되는 그림을 그리고 싶은 것이 그의 꿈이다.
자립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에게 바라는 이상형을 묻자 상기된 표정으로 착하고 신앙심이 깊은 여성, 또 장애와 그림을 이해해주는 사람이면 감사하다고 한다. 매일 오전 10시부터 시작한 그림 그리기는 오후 3시쯤 붓을 놓기까지 간간히 휴식을 취하는 것 빼고는 온통 물감 속에 파묻혀 산다. 현재 그는 서울 홍익대학교 교육원과 안양에서 그림을 배우고 있다.
최향숙 기자
essaychs@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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