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배다리‘시다락방’에서 열린 시 낭송회에서 박일 시인이 초청, 자신의 시를 낭송하고 있다.
시인이든 소설가든 어느 장르든 한 작가가 정주성을 지닌채 한 지역의 노임새를 작품에 담기란 그리 쉽지 않다.
만일 글로 옮겨진 작품이 후세까지 전해 왔다면 그것은 자료이며 보관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 왜냐면 모든 연
구에 밑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역사속에서 저항정신을 표출한 민족적 애국의 소산이고 노동 집약적 말로에서 탄생한 민초들의 보호본
능에서 시작된 역사일 수 도 있기에 값진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30년대를 지나며 민족문화의 말
살과 탄압이 한층 속도를 낼 대륙침탈 시기의 김영랑과 정지용등이 빛나는 저항시인으로 오늘날 문단의 초석이
된 것이다. 거슬러 올라가 왕초시절의 문인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창작 기법(?)에서 한참 먼 한(恨) 풀이나 당
파싸움에서 비롯된 문장결투(?)의 것으로 그치거나 자연의 유유자적 노닐며 예찬한 것에 지나지 않는 음풍농월
의 유희다. 인간사에 필요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를 구원케하는 모럴은 더 더욱 없지 싶다. 시문(詩文)에서는 산
문에 비하면 두드러진 현상이다.
‘문학속 남구의 풍광’을 찾고자 시작 된 본 연재의 난, 심히 진통에 고민이 많다. 더욱이 남구에 초점을 맞춘다
함이 어렵다. 몇몇 작가들이 인천을 위한 인천의 작품은 남아있지만 현대에 들어서는 더 찾기 힘들어 졌다. 그
소재가 진부해서인가, 아님 자기 창작(책)작품속에 넣기가 그저 그런건가, 영문 모른채 씁쓸하다.
1월의 마지막 토요일 오후 2시 배다리 ‘시다락방’을 찾았다. 초청시인 ‘박일’25세의 나이에 남구 수봉산 ’수봉
아파트‘에 거주하던 대학생 박일 시인은 누구 못지않게 인천의 시(특히 남구에 관한)를 남긴 시인이 아닌가 한다.
이제 58년생으로 50줄이 넘은 시인의 작품 낭송회, ‘인천비’‘의 연작 그리고’‘사랑에게’‘눈’‘유월’등, 한 시제목
에 심취 다양하고, 폭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기에 가능하다는 것이 일성이며 자아에 대한 그의 진지한 반성과
모색의 소산이라 여겨진다.
“남구의 지명이 시속에 많이 나타난 이유는 무엇입니까?” 낭송회에 참석한 사람의 질문이다.
“사람이 살다보면 꼭 명승지를 대입하는 것보단 시어의 명징성을 나타내고 살던곳의 역사성이나 대표성을 나
타내면 그것으로 족한 것 아니겠습니까”하는 박시인의 답변. 그렇다. 멀리서 찾을 이유는 없다.
누군가 그리워지는 날 / 그대들 심장을 벗어난 혈도를 따라 만져 봐 / 신기촌 네거리 고장난 신호등 곁에서 가
을날 낙엽보다 / 더 곱게 흔들리는 인천 (중략) ‘인천비·5’
비가오는 날 이었나보다. 거리로 나와 비 맞으며 시를 머릿속에 가두며 신기촌(중구쪽 재개발에 이주한 주안7
동 일대의 옛 명칭)을 걸었겠지. 그리고 ‘눈’의 연작시중에 간간히 나오는 남구의 지명, 예사롭지 않게 지난 과
거와 현재가 오버랩 된다.
숭의동 골목길을 / 덮을 듯이 / 그 지붕 낮은 집들 처마를 / 덮을 듯이(중략) ‘눈·1’
어느해 눈이 지천을 덮듯이 내렸겠지 그러면서 유언과 같은 가슴에 남긴 말까지도 덮을 듯이 내려 갖혀있는 시
인의 마음, 내버려두며 눈 속에 묻혀있는 심정은 ‘눈·3’으로 이어져 사랑하는, 했던 여인이었을까? 그녀가 간
다고 했다.
그녀가 간다 / 제물포역 하행선 플랫폼 / 그녀가 남긴 / 그림자와 세월이 남긴 발자국 하나가 / 간다 / 해를 삼
키는 / 바다로. 어느 누구든 가난의 세월이 그렇게 뼈속에 묻히는 가 보다.
너나 할 것 없이 가난 속에서 대학 공부란 어려운것 아닌가. 제대후 복학으로 이루어진 때, 살고 있는 지역의 내
력이 담긴 글을 ‘눈·4’에서 또 남기니
어스름 사이로 걸어오는 수봉산 / 그 중턱 언저리 / 방향을 잃은 갈매기 발가락 끝에 / 그녀의 목소리가 (중략)
‘현대시학’으로 문단에 나와 다작하지 않는 원칙주의자 그는 1985년 조병화의 추천으로 글에 빛을 더한다.
현재는 송도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인천문협에 공헌, 전도가 유망한 시인이다.
김학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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