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는 2013년이 그 어느 때보다 의미 있는 해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미추홀로부터 시작된 인천 역사가 2030년이 넘었고, 인천 이름 탄생으로부터도 600년이 되는 시점이다.
인천광역시 10개의 군구 가운데 2030년 인천 역사의 출발지이자 인천 이름 탄생의 근원지인 남구는 지금이야말로 남구가 갖는 역사적 역할과 그 위상을 되새겨 볼 수 있는 전환점에 서 있다. 그 역할을 통해 남구가 재도약 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인천 역사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남구의 역사적 역할은 대체로 4가지의 특징으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개국(開國)과 왕도(王都)의 공간이었다.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문학산 일대는 바다와 인접한 자연지리적 조건으로 일찍부터 생활터전이 되었고 BC.18년 비류의 미추홀 정착은 개국의 서막이었다. 고려시대 이 지역 출신의 인주 이씨가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는 7대 80여년(1047~1126) 동안 정권을 장악하고 왕실과 중첩되는 혼인관계를 맺음으로써 외척으로서의 권세와 벌족으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이 7대 동안 인천은 왕의 외향이거나 왕비의 내향이었기 때문에 ‘경원(慶源)’이라 하였고 또 ‘7대어향(七代御鄕)’이라고도 하였다는 사실에서 왕도의 공간이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둘째, 해상교류의 선구지였다.
비류의 미추홀 정착이 소금을 매개로 한 해상교류권의 확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면 능허대는 고대 중국으로 가는 뱃길의 효시였다. 당시 삼국의 정치형세는 백제가 고구려·신라와 대치관계에 놓여 부득이 해로를 통하여 중국과 통교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해상교통로가 능허대에서 덕적도를 거쳐 중국 산동반도에 이르는 등주항로(登州航路)였다. 능허대가 비록 지금은 연수구 옥련동에 위치해 있지만, 1995년 연수구가 분구되기 전까지는 남구에 속한 지역이었다.
셋째, 호국의 공간이었다.
문학산성(文鶴山城)은 대표적인 관방시설로 임진왜란(1592) 당시 김민선 부사가 산성을 보수하여 누차 왜적을 무찔렀으며, 성내에 있었던 안관당(安官堂)은 김민선 부사뿐만 아니라 문학산에서 제의를 지냈던 유적이다. 신미양요(1871) 당시에도 문학산에 군사 진영을 두고 경계를 강화했으며 문학산신에게 제의를 지냈던 기록이 있다.
넷째, 교육과 사상의 정신적 공간이었다.
조선시대 인천 유일의 사액서원인 학산서원과 인천향교가 유교 교육의 대표적 상징이었다면, 서해바다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던 원도사는 국가적인 제의의 상징이었고, 고려시대 사찰로 알려진 학림사와 문학사, 길마사, 연경사, 청량사 등은 인천의 불교문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흔적이었다.
이러한 4가지의 특징을 통해 남구의 역사적 역할을 찾아 볼 수 있고, 이것이 곧 인천 역사의 성격이기도 하다. 인천 역사의 근원이자 출발점인 남구는 이제 역사고도(歷史古都)로 거듭 태어나야 할 것이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강옥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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