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비는 지방 수령들이 임기를 마치고 귀경할 때 수령의 선정(善政) 사실을 표창하고 기리기 위해 그 지역 백성들이 고마움의 표시로 세웠다는 것인데, 임진왜란 이후 특히 인조대부터 건립이 일반화되다가 세도정치기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난립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대개 관청 입구나 마을 입구 도로변에 즐비하게 서 있는 선정비는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조선시대 유물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인천 지역에도 인천을 비롯하여 강화, 부평, 옹진 등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조선 후기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병리현상 중에서 토지세의 과중, 병역 문제의 협잡, 대여 곡식에 대한 과도한 이자 등은 수령에 대한 인식을 부정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당연히 수령의 이임과 취임에 대한 행사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났다. 그래서 수령을 ‘도둑’으로 묘사하여 “오늘 이 도둑을 보낸다 해도, 내일이면 또 다른 도둑이 올 것이니, 결국 도적은 끊임없이 오는 것으로 이 세상은 온통 도둑뿐이네(今日送此盜, 明日來他盜. 此盜來不盡, 擧世皆爲盜)” 라 하였다. 더욱이 수탈을 일삼던 수령까지 의례적으로 선정비를 세우기도 했기 때문에 원한의 표적으로 여겼던 것은 당연할 수 있다.
인천 향교 앞의 선정비군은 인천도호부 관아 앞길에 흩어져 있던 것을 유림 측에서 향교에 모아 세웠다가 근래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비석군을 시대적으로 나열하면 이후천(李後天)의 인정제민비(仁政濟民碑)가 1629년에 설립됐고, 마지막은 1899년에 세워진 박제순(朴齊純)의 비이다. 시간적으로는 270년이고 이 기간 인천에 부임했던 수령은 194명에 달한다. 그동안 선정비의 유실이 얼마만큼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현재 남아있는 선정비는 총 16개로, 시간과 인원으로 대비해 볼 때 선정비가 ‘과다’하게 설립되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 중 임기 15개월 이상 재임한 수령이 11명이고 최장수 부사로는 정동면(鄭東勉)이 59개월 동안 재임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 선정비 설립 자체에는 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선정비 건립이 결정되면 사림(士林)과 각 면(面) 향약의 책임자(약정, 約正)가 회의를 통해 제반 절차를 논의 하였다.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건립 경비와 석재 운반은 각 면에 나누어서 확보 추진하였다. 선정비 구성은 비교적 간단하였기 때문에 제작 소요일은 길지 않았고, 비의 크기도 제한되었으며 돌의 재질 역시 당시에 일반적으로 쓰이던 보편적인 것이었다. 비문에 새긴 내용과 ‘글자의 수’를 보더라도, 그것을 세우는 자체가 민간에 엄청난 부담을 줄 정도는 아니었으며, 단지 그간의 노고를 기념하기 위한 형식적인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송덕비(頌德碑)·애민비(愛民碑)·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라고도 하는 선정비에 대한 오늘날의 불신은 ‘공적인 기념비’를 정말 선정을 베푼 전임 사또의 덕을 기려 세워진 것인지 의문이 생기기 때문이다. 연암 박지원은 끝끝내 송덕비를 세우지 못하게 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는데, 그와 궤를 같이했던 조선의 관료들이 많았던 것도 함께 헤아려야 하는 부분이다. 돌에다 새기는 것보다 행인의 입에 이름을 새기는 것이 ‘구승비(口勝碑)’인데, 이를 최고라 했던 의미를 새겨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