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은 그동안 외형적 팽창과 개발이 진행되면서 부지불식간에 사라진 문화유산이 많은데, 선사시대인들의 생활문화를 보여주는 고인돌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인천에 남아 있는 고인돌은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강화의 고인돌군 외에 비류의 근거지가 되었던 남구 문학산일대 주안동, 문학동 및 학익동 고인돌과 서구의 대곡동 고인돌군이 파악되고 있다.
고인돌은 큰 돌을 받치고 있는 ‘괸돌’ 또는 ‘고임돌’에서 유래하는데, 지석묘라고도 불린다. 대부분 무덤으로 쓰이고 있지만 공동무덤을 상징하는 묘표석(墓標石) 또는 종족이나 집단의 모임 장소나 의식을 행하는 제단(祭壇)이나 혹은 기념물로도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고인돌의 기원은 시베리아 거석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북방설, 동남아시아에서 왔다는 남방설, 그리고 한반도에서 독립적으로 발생했다고 보는 자생설 등이 있다. 그 상한연대도 신석기시대부터 시작되어 청동기시대에 주로 만들어지다가 철기시대에 사라진 것으로 보고 있다. 대규모의 고인돌이 출현한다는 것은 분화된 계층과 지배자가 등장하고 조직화된 사회가 발달하는 시대의 변혁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의 형태는 북방식, 남방식, 개석식으로 나뉘는데, 일반적으로 남방식은 매장시설의 주요 부분이 지하에 설치되어 있는 것이고, 북방식은 지상에 있는 것이다. 남방식은 판석을 사용하여 지하에 석실(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한 뚜껑돌(개석)을 올려놓은 것인데, 다시 받침돌이 있는 기반식(바둑판식)과 없는 개석식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남방식은 주로 한강 이남지역에, 개석식은 한반도 전체, 요동반도, 일본 큐슈지방에 널리 분포하고 있다. 북방식(탁자식)은 황해도나 대동강 유역, 강화 및 중국의 요동반도 등에 주로 분포하고 호남지방에서도 일부 발견되고 있다. 고인돌은 우리나라 국토 전역에 걸쳐 나타나지만, 대체로 서해 및 남해의 연안지역과 큰 하천 유역에 주로 분포되어 있고, 대부분 5, 6기 내지 10여기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1백~2백여기씩 무리를 지어 있다.
남구 문학산일대의 고인돌은 초기 조사에서는 학익동에 7~8기, 주안동에 2기, 문학동에 1기가 분포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지만, 현재 그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는 학익동 고인돌 2기와 주안동 고인돌 1기, 문학동 고인돌 1기 정도이다.
주안동 고인돌은 용일사거리 부근 사미부락에 있었던 것인데 1957년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문학동 고인돌은 문학산 서북쪽 도천현 남쪽 언덕 밭 가운데 있던 것으로 1962년 조사 발굴되었다. 모두 시가지 확장으로 1979년 수봉공원으로 이전되었다가, 2005년 미추홀 공원으로 옮겨져 있다. 학익지석묘는 1927년에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의하여 처음으로 발굴 조사되었는데 석부(石斧)와 다수의 석기류 등이 함께 출토되었다. 학익동 소년교도소 서쪽 언덕위에 있었는데 교도소를 늘리느라고 1971년 자유공원으로 옮겼다가 현재는 옥련동 시립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다. 이들 고인돌은 근래 발굴된 서구 대곡동 고인돌군과 함께 모두 북방식 형태가 그 특징이다.
문학산일대에서 발굴된 고인돌은 선사시대 남구지역에 독립된 영역을 가진 공동체가 형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근거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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