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락 흥행 대박… 비주얼 볼거리 넘치는 감동
백인 우월주의 폭력찬양 가득찬 기형적 괴물
영화란 참 애매한 문화매체이다. 예술이라고만 하기엔 대중성과 상업성의 논리에서 벗어나기 힘들고, 오락이라고만 하기엔 그 정치적 문화적 파급효과와 더불어 다른 어떤 예술매체가 따라오기 어려운 영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영화를 ‘아트 비즈니스(Art Business)'라고 하는 데는 영화가 그 중간 어디엔가 위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300]은 이러한 영화매체의 모호한 위치의 정점에 서있는 영화라 할 수 있다. 흥행이라는 비즈니스와 오락의 측면에서 이 영화는 한 마디로 ‘대박'이다. [씬시티(Sin City)]에서 이미 입증된 ‘프랭크 밀러'의 강한 영상미와 BC480년 수십만 페르시아 대군에 맞서 싸운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들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의 역사적 줄거리는 이미 오락영화로서의 볼거리와 감동을 전달하기에 충분하며 이러한 바는 이미 전 세계적인 흥행 성과로 입증되고 있다.
시각예술의 견지에서 [300]은 예술적이다. 단순히 만화에서 차용되었고 CG로 만들어졌다고 해서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음영이 분명한 만화 위에 CG로 이뤄낸 이 영화의 비주얼은 입이 벌어질 정도다.
멋있다. 줄거리도 마찬가지다. 고작 300명의, 그러나 ‘선택되어 길러진' 스파르타의 꽃 미남에 근육질의 전사들이 수십만 페르시아의 무서운 ‘괴물' 들에 맞서 싸운다. 엄청난 숫자의 페르시아 적들에게 겁을 내는 이웃나라 동료에게 한 스파르타 전사가 너무나 좋아하며 말한다. “이제야 제대로 된 적들과 전장에서 싸우다 죽을 수 있겠다!" 한마디로 ‘죽이지' 않는가?
하지만 ‘영화보기'에서 ‘영화읽기'의 시각으로 바꾸어 이 영화를 보면 사정은 달라진다. 스파르타 전사로 대표되는 유럽 백인들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나 나올법한 그런 완벽한 신의 모습이다. 그에 반해 흑인과 아시아인들로 가득 찬 페르시아 군인들은 죄다 기형에 괴물이다. 그것도 수십만 대군이 전부 다! 그래서 영화는 백인 우월주위와 폭력 찬양으로 가득 찬 기형적 괴물이 되어버린다.
정치적 약점이 많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영화가 주는 강한 힘에 휩쓸리게 된다. 그것은 바로 영화를 보는 내내 나 자신을 페르시아의 어느 한 아시아인에게 일체화(Identification)하지 않고 오히려 주인공이나 다른 스파르타 전사들 중의 하나에 투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영화를 제외한 모든 외국영화에서 감동을 얻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될 것이다.
영화를 볼 것인가? 읽을 것인가? 그 대답은 “영화가 예술(Art)인가? 산업(Business)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것처럼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냥 영화는 예술이며 동시에 산업이고, 때론 보기도 하고 읽기도 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지나치게 중도(中道)적인 대답일까? 하지만 그게 정답일지도 모른다.
|김정욱ㆍ영화공간주안(CineSpaceJuan) 프로그래머
백인 우월주의 폭력찬양 가득찬 기형적 괴물
영화란 참 애매한 문화매체이다. 예술이라고만 하기엔 대중성과 상업성의 논리에서 벗어나기 힘들고, 오락이라고만 하기엔 그 정치적 문화적 파급효과와 더불어 다른 어떤 예술매체가 따라오기 어려운 영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영화를 ‘아트 비즈니스(Art Business)'라고 하는 데는 영화가 그 중간 어디엔가 위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300]은 이러한 영화매체의 모호한 위치의 정점에 서있는 영화라 할 수 있다. 흥행이라는 비즈니스와 오락의 측면에서 이 영화는 한 마디로 ‘대박'이다. [씬시티(Sin City)]에서 이미 입증된 ‘프랭크 밀러'의 강한 영상미와 BC480년 수십만 페르시아 대군에 맞서 싸운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들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의 역사적 줄거리는 이미 오락영화로서의 볼거리와 감동을 전달하기에 충분하며 이러한 바는 이미 전 세계적인 흥행 성과로 입증되고 있다.
시각예술의 견지에서 [300]은 예술적이다. 단순히 만화에서 차용되었고 CG로 만들어졌다고 해서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음영이 분명한 만화 위에 CG로 이뤄낸 이 영화의 비주얼은 입이 벌어질 정도다.
멋있다. 줄거리도 마찬가지다. 고작 300명의, 그러나 ‘선택되어 길러진' 스파르타의 꽃 미남에 근육질의 전사들이 수십만 페르시아의 무서운 ‘괴물' 들에 맞서 싸운다. 엄청난 숫자의 페르시아 적들에게 겁을 내는 이웃나라 동료에게 한 스파르타 전사가 너무나 좋아하며 말한다. “이제야 제대로 된 적들과 전장에서 싸우다 죽을 수 있겠다!" 한마디로 ‘죽이지' 않는가?
하지만 ‘영화보기'에서 ‘영화읽기'의 시각으로 바꾸어 이 영화를 보면 사정은 달라진다. 스파르타 전사로 대표되는 유럽 백인들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나 나올법한 그런 완벽한 신의 모습이다. 그에 반해 흑인과 아시아인들로 가득 찬 페르시아 군인들은 죄다 기형에 괴물이다. 그것도 수십만 대군이 전부 다! 그래서 영화는 백인 우월주위와 폭력 찬양으로 가득 찬 기형적 괴물이 되어버린다.
정치적 약점이 많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영화가 주는 강한 힘에 휩쓸리게 된다. 그것은 바로 영화를 보는 내내 나 자신을 페르시아의 어느 한 아시아인에게 일체화(Identification)하지 않고 오히려 주인공이나 다른 스파르타 전사들 중의 하나에 투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영화를 제외한 모든 외국영화에서 감동을 얻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될 것이다.
영화를 볼 것인가? 읽을 것인가? 그 대답은 “영화가 예술(Art)인가? 산업(Business)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것처럼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냥 영화는 예술이며 동시에 산업이고, 때론 보기도 하고 읽기도 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지나치게 중도(中道)적인 대답일까? 하지만 그게 정답일지도 모른다.
|김정욱ㆍ영화공간주안(CineSpaceJuan) 프로그래머
- 이전글 “예술영화 이제 남구서 보자”
- 다음글 남구 평생학습프로그램 ‘성인문해교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