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를 기억하며
신중균(관교동)
갓 태어난 동생 때문에 피난 못가고
아버지 향한 인민군 총부리에 ‘섬뜩’
인민군이 아버지를 향해 총구를 겨눈다. 하얗게 질린 아버지 얼굴, 어머니가 총구를 옆으로 밀어내며 그를 달랜다. “괜찮습니다, 괜찮아” 신발 신고 마루로 뛰어오른 인민군을 나무라던 아버지 때문에 생긴 위급상황이었다.
인민군들이 한참 후퇴 중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안방을 통해서 뒤쪽울타리를 뛰어넘어 빠르게 도망갔다. 순간 우리들은 가슴이 또 한번 섬뜩했다. 당시 인민군에 끌려갔다 도망친 막내 외삼촌이 우리집 안방에 숨어 있었다. 다행히 문 뒤에 있었기에 그는 외삼촌을 보지 못했다.
죽을 고비를 넘긴 상황은 계속 됐다. 우리집은 대전 문화동이었다. 6ㆍ25 발발 후 미군들이 계속 우리 집 앞을 지나 대덕군 방향의 산속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때문에 인민군들은 우리집을 수색했다. 우리 가족은 동생이 태어났기 때문에 피난도 가지 못하고 있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 는 것이 아버지의 심산이었다고 후에 말씀하셨다.
집이 동네어귀에 위치했던 관계로 지나는 피난민들이 무거운 짐들을 처마 밑이나 마당에 놓고 갔다. 그 중 경찰관이던 고종사촌형이 맡긴 짐 속에서 권총이 나왔다. 총구를 들이대는 인민군 장교 앞에서 모른다고 변명하던 백지장 같던 아버지 얼굴이 떠오른다. 모르는 사람들이 맡기고 갔다는 어머니의 침착한 설명과 호소가 또 한번 아버지를 구했다.
어린 다섯 남매들은 아버지가 덮어놓은 솜이불을 들치고나와 마루 빈지문 사이로 전쟁실황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포격 속에서 총알이 빗발치는 길에는 먼지가 풀썩풀썩했다. 어린 우리는 신이 나서 마치 영화라도 보듯 이 상황을 지켜봤다. 아찔하고 섬뜩했던 순간들. 55년 전의 6ㆍ25를 다시 한번 상기해본다.
신중균(관교동)
갓 태어난 동생 때문에 피난 못가고
아버지 향한 인민군 총부리에 ‘섬뜩’
인민군이 아버지를 향해 총구를 겨눈다. 하얗게 질린 아버지 얼굴, 어머니가 총구를 옆으로 밀어내며 그를 달랜다. “괜찮습니다, 괜찮아” 신발 신고 마루로 뛰어오른 인민군을 나무라던 아버지 때문에 생긴 위급상황이었다.
인민군들이 한참 후퇴 중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안방을 통해서 뒤쪽울타리를 뛰어넘어 빠르게 도망갔다. 순간 우리들은 가슴이 또 한번 섬뜩했다. 당시 인민군에 끌려갔다 도망친 막내 외삼촌이 우리집 안방에 숨어 있었다. 다행히 문 뒤에 있었기에 그는 외삼촌을 보지 못했다.
죽을 고비를 넘긴 상황은 계속 됐다. 우리집은 대전 문화동이었다. 6ㆍ25 발발 후 미군들이 계속 우리 집 앞을 지나 대덕군 방향의 산속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때문에 인민군들은 우리집을 수색했다. 우리 가족은 동생이 태어났기 때문에 피난도 가지 못하고 있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 는 것이 아버지의 심산이었다고 후에 말씀하셨다.
집이 동네어귀에 위치했던 관계로 지나는 피난민들이 무거운 짐들을 처마 밑이나 마당에 놓고 갔다. 그 중 경찰관이던 고종사촌형이 맡긴 짐 속에서 권총이 나왔다. 총구를 들이대는 인민군 장교 앞에서 모른다고 변명하던 백지장 같던 아버지 얼굴이 떠오른다. 모르는 사람들이 맡기고 갔다는 어머니의 침착한 설명과 호소가 또 한번 아버지를 구했다.
어린 다섯 남매들은 아버지가 덮어놓은 솜이불을 들치고나와 마루 빈지문 사이로 전쟁실황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포격 속에서 총알이 빗발치는 길에는 먼지가 풀썩풀썩했다. 어린 우리는 신이 나서 마치 영화라도 보듯 이 상황을 지켜봤다. 아찔하고 섬뜩했던 순간들. 55년 전의 6ㆍ25를 다시 한번 상기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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