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건강/생활

걸음을 더할수록 신록은 짙푸르다. 중턱의 쉼터까지는 한고비를 넘어야 한다. 그곳까지 오르면 발아래 펼쳐지는 진초록의 융단이 안겨주는 기쁨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
 도심에서 멀지 않은 야산이면 어떠랴. `한계령'을 나지막히 부르면 나는 이미 한계령에 와 있는 것이다. 안개 구름에 흠씬 젖어 길을 잃으면 또 어떠랴. 굽이굽이 돌아서 만난 산모롱이를 발아래 거느리고 있다는 착각에 기꺼이 빠지고 싶다. 제아무리 굽이가 많기로 굴곡 많은 인간사에 비하랴.
 그럴 때 쯤이면 양 팔 가득 구름을 몰고 방황하는 바람인양 실체도 없이 떠돌고 싶다. 환상이 이 정도에 이르면 조금 전 초입에서 들이킨 석간수는 설악(雪岳)의 약수가 된다. 땅을 뒤덮을 듯한 널따란 바위 틈에서 울컥 울컥 솟아나오던 그 신비의 물로 목을 축이는 경지에 다다르게 된다. 바위에 털석 주저앉아 들이키던 알싸한 오색약수 특유의 맛으로 음미하면 그만인 것이다.
 이곳을 넘으면 동해바다가 나를 안을 것이다. 내 기꺼이 파도의 흰 포말에 발을 담그고 옷을 적시리라. 때마침 불어오는 해풍에 입을 맞추고, 모든 시름 짙푸른 동해에 말끔히 헹구어 내리라.
 그러나 여기는 자동차들의 소음을 겨우 떼어놓은 도회의 야산인 것을…. 사람들은 적당히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 받고자 산을 찾는다. 이곳이라면 한 주일간 찌들었던 심신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인지 온 산을 들썩인다. 나도 그들 틈에 적당히 때 묻은 마음을 스치는 바람결에 털어낸다. 잘 생긴 나뭇가지 하나를 골라 흰 옥양목을 널 듯 마음을 펼쳐 널어본다.
 내가 이 산을 즐겨 찾는 이유는 정상 때문이다. 그곳에 오르면 낯익은 장면이 기다린다. 음료를 파는 부부의 좌판이다. 남편은 언어 장애를 가졌다. 처음에는 그것을 알지 못했으나 누구라도 그들과 두어 번 마주치면 상황을 짐작하게 되리라.
 정상에 이르면 숨을 고르기 전에 그 좌판에 들러야 한다. 주변의 나무 벤치에 앉아 여유롭게 전망을 즐길 여유가 없다. 그들을 기대를 외면하는 듯해서이다. 다가서면 여자는 냉커피를 마시겠냐며 묻고, 남자는 재빨리 캔 음료가 가득 담긴 아이스박스를 열어 고르라는 손짓을 한다. 나는 박스 안의 얼음이 녹을까봐 얼른 닫으라는 시늉을 하고 주로 냉커피를 받아온다. 얼음은 그녀가 따라주는 보냉 통에서 이미 녹아 달그락 소리를 낼 뿐이다. 종이컵에는 별로 맛없는, 조금 시원한 커피가 담겨있을 뿐이지만 발걸음은 가볍다. 그들의 일과에 한부분이라도 동참했다는 즐거움도 있다. 그제서야 편안한 마음으로 정상을 즐겨도 좋으리라.
 저 부부의 하루를 생각해 본다. 두 사람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가 새벽부터 서둘러 하루의 벌이를 위해 짊어지고 올라왔을 짊의 무게보다 무겁지 않았으면 좋겠다. 저 부부에게 있어 산은 그저 땀 흘려 오르기만 하면 되는 산이 아니리라. 그들이 넘고 넘어야할, 평생을 가야만 할 산이리라.
 가벼운 배낭도 짐이라고 몇 번을 쉬어가며 간신히 올라온 나의 산행이 부끄럽다. 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여가를 활용할 양으로 오르는 휴일의 등산이 저들에게는 엄연한 삶의 터요 생존 현장이 아니었던가.
 삶이 겸허해 짐은 이 산이 주는 선물이다.
 그러나 나의 산도 이곳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적당히 지친 발걸음으로 하산하여 만나는 도심의 곳곳에 산은 버티고 있다. 가끔은 나를 지치게 하는 모든 것들은 내가 만나는 산이다. 한계를 넘지 못한 글쓰기 작업도 산이요, 내 삶을 꾸리며 이루어야 할 주변과의 조화(調和)도 산이다. 불확실성과 외로움에 좌절했던 젊은 날의 외로웠던 봉우리를 넘었으나, 중년의 혼란스러운 중턱이 내게 악수를 청한다. 내가 넘어야 할 고개도 지금은 알 수 없다.
 산과 마주칠 때마다 그를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그러나 매번 그것들은 얼굴도 내보이지 않고 높이도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럴 때면 게으른 발걸음으로 정상이 보이지 않는다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가까스로 올라 봉우리에 이르면 결국은 내려와야 한다. 모두 내려오기 위해 오르는 산이다.
또 다른 산을 넘으라며 내 등을 떠미는 산을 내려온다. 차 소리가 가까워진다.

 작가약력
◇ 한국문인협회, 국제pen클럽 회원
◇ 제물포 수필문학상(1999)
◇ 인천문학상(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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