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해 전 모 지면에 `1954년 연감(年鑑) 속의 인천` 이야기를 쓴 적이 있었는데 며칠 전 우연히 그 글을 다시 보다가 문득 내가 성장했고, 내 본적지가 된 미추홀구에 그 당시 병원이 네 군데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랐다.
당시는 오늘의 중구와 동구가 인천의 중심지였고, 그래서 숭의동부터는 변두리나 다름없었다 해도, 이 넓은 미추홀 구역 전체에 병원이 고작 4개뿐이었다니…. 그나마도 용현, 주안, 도화동 등지에는 없이 모두 숭의동 지역에만 있었으니….
그러나 그것이 나와 내 어머니에게는 다행이었다. 바로 1954년까지 숭의동 집과 내동, 인현동 집을 오가며 지내다가 1954년 마침내 숭의동 308번지에 눌러 살게 되면서, 얼마 후 병원에 갈 일이 생겼던 것이다. 무엇을 먹고는 급체가 걸린 것이다. 인현동 대한서림 못미처 골목 초입에 살 때까지는 병이 나면 으레 신포동 자선소아과나 답동성당 해성병원을 찾았는데, 숭의동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가게 된 병원이 숭의동 137번지 삼성의원(三省醫院)이었다. 우리 집 번지 수 308번지와 삼성의원 번지수 137번지는 상당히 거리가 있을 듯싶지만, 집에서 나와 경인국도를 건너면 서울 방향으로 불과 1백 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였다.
얼굴이 핼쑥해서 삼성의원에 들어섰을 때, 간호원의 안내로 내가 만난 의사는 굉장히 살이 찌신 거구의 선생님이었다. 누런 테의 안경을 끼신 의사 선생님은 청진기를 앞뒤로 대 보시더니 급체라고 하시면서 주사는 없이 약만 처방해 주셨다. 그리고는 내 옆에 서 계신 어머니께 데려가서 손가락을 넣어 토하게 하고 약을 먹이면 나을 것이라고 했다. 그날 그 풍채 좋은 의사 선생님이 허이복(許利福) 원장이었다. 후일 알게 되었지만 그분은 지역의 유지였다. 연세 때문이었을까. 1960년대에 들어 병원 문을 닫은 것 같다. 병원 건물은 2층이었고, 붉은 벽돌담이 둘러쳐져 있었는데, 특히 벽돌담 중간쯤 높이에 빙 둘러 `+형` 구멍이 간격을 두고 나 있어서 나무와 꽃이 자라고 있는 정원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또 하나의 병원은 숭의동 390번지에 있던 순천의원(順天醫院)이었다. 지금 이 일대는 공구상가로 변해 그 위치를 기억하기가 어렵게 되고 말았다. 또 1980~90년대 한때는 `독갑다리 방석집`이라고 부르던 술집들이 즐비했던 곳이기도 하다.
순천의원 오근영(吳根英) 원장은 고등학교 2년 후배 순조(純祖) 군의 부친이어서 뵐 때마다 인사를 드리곤 했지만, 치료를 받으러 가는 것은 왜 그런지 껄끄러워서 다른 병원으로 다니곤 했다.
숭의의원(崇義醫院)은 406번지에 있었다. 앞의 두 병원의 진료과목이 전과(全科)로 되어 있는 데, 임송산(林松山) 원장은 내과와 소아과를 전문으로 내세웠다.
마지막 네 번째 병원이 숭의동 109번지에 있던 이남금(李南錦) 원장의 창영의원(昌榮醫院)이었다. 지난날 전도관 산언덕 경사(傾斜)는 철길 쪽으로 완만히 흘러내리는 형상이었는데, 전철역 복선화와 도원역 설치를 위해 언덕 밑동을 수직으로 절단해 축대를 쌓고, 그 위에 길을 내는 바람에 병원자리는 사라지고 말았다. 병원명은 번화가였던 창영동과 경계에 있었던 까닭에 그렇게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1950년대 미추홀구 지역의 병원 네 곳이 모두 숭의동에만 있었던 것은 당시 중구, 동구의 인구가 팽창하면서 넓고 집값 싼 숭의동으로의 이주가 크게 늘어난 때문이 아니었던가 싶다. 오늘날 미추홀구의 병의원이 줄여 잡아도 백여 군데는 족히 넘을 것을 생각하면, 1954년과 오늘, 실로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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