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추홀구 이야기를 하면서 어째서 도원극장을 꺼내는가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결론적으로 말해 사라진 이 극장은 그 주소지가 숭의동 131번지였기 때문이다. 후일에 몇 개 극장이 더 생겨났지만, 1958년에 생겨난 장안극장을 선두로 1960년, 미추홀구에 두 번째로 생겨난 극장이 이 도원극장이다.
옛 공설운동장은, 야구장 일대는 중구 도원동, 육상장 지역은 미추홀구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도원극장은 육상장 동북쪽 출입문에서 2~30m쯤 떨어져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니까 극장의 위치는 숭의동이 분명한데, 사람들이 오해하기 똑 좋게 명칭을 도원극장이라고 한 것이다. 아마도 인접한 도원동의 ‘도원(桃源)’이란 말이 썩 풍류가 느껴져 그렇게 정하지 않았나 싶다. 후일 극장이 없어지고는 인천시체육회사무실이 그 위치쯤에 세워졌었다.
지금은 육상장도 야구장도, 체육회사무실, 그 앞에 늘어서 있던 상점들, 대장간들도 다 사라져 버리고 이 일대에 새로 만든 축구장을 감싸듯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서 극장 위치를 설명하는 일이 도무지 안개 속을 헤매는 것처럼 힘들다. 필력이 모자라 시원스럽게 그림 그리듯 써 내려가지 못하니 더욱 답답하다.
부지(敷地) 매입 문제 같은 사정이 있었겠지만, 도원극장은 대로(大路)를 피해 숨어들듯이 안쪽 육상장 앞에 앉아 있었다. 대로변에는 6·25 후에 생겨난 고만고만한 가게들이 죽 늘어서 가로막고 있었던 까닭에 극장의 몸통은 차라리 육상장 안에서 더 잘 보였다. 공교롭게도 내 외가 쪽 아주머니께서 1960년 봄에 결혼해 신혼 생활을 하시던 건재상(建材商) 옆으로 승용차 한 대쯤 가까스로 갈 만한 길이 나 있어 도원극장과 통했다.
여러 해 전에 어느 지면에 이 극장에 대해 썼던 글이 있다. 그런데 그만 어떤 사람이 그 글의 일부를 버젓이 자신의 이름 아래 인터넷에 올리고 있다. 아무튼 그 글은 내 나름대로 당시의 정황과 함께 그 극장의 흥망(興亡)을 짐작해 쓴 내용이다.
1960년대 초반 무렵에 생겼다가 오래지 않아 사라진 도원극장이 있다. 이 극장은 숭의공설운동장 육상장 동쪽 끝에 있었는데, 도심인 중·동구를 벗어난 곳인 데다가 인근에 고작 숭의깡시장이 있고, 대장간, 기름집, ‘오꼬시’ 같은 과자를 파는 가게, 미군 맥주깡통 세공업자, 목수간, 파지장수, 영세 철물점 따위가 늘어서 있던 주변 환경으로 보아 흥행이 그다지 좋았을 리 없다. 개봉관이라는 야심찬 출발을 했으나 결국 변두리 극장 신세를 못 면하고 일찍 문을 닫았다. 사장은 이 지역의 개발, 즉 도시화를 내다보았을 것이나 그의 선견지명이 너무 앞섰다는 느낌이다.
이것이 내가 썼던 글의 일부분이다. 당시 인천시내라고 하던 중·동구지역은 인총(人叢)이 포화상태라 서서히 미추홀구 방향으로, 특히 숭의동 쪽으로 주거(住居)가 밀려오던 때라 극장주는 그런 추세라면 머잖아 대단한 흥행이 오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라는 점을 내 나름대로 추측했던 것이다. 거기에 저 건너편 장안극장의 성공도 도원극장의 탄생을 부추겼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이 일대가 여전히 낙후를 벗지 못한 상태임을 보면, 그때 그 극장주의 장밋빛 예측은 빗나가도 한참 빗나갔던 것이다. 더구나 뒤이어 닥친 TV시대의 도래도 이 극장의 퇴장을 더욱 재촉했을 것이다. 도원극장은 1979년에 문을 닫고 한동안 썰렁하게 덩치만 남아 있었다.
1964년이었던가, 추운 겨울날 열 명 정도의 관객이 극장 안에 설치된 연탄난로 옆에 빙 둘러서서 ‘괴인 드라큐라’라는 영화를 오싹한 느낌 속에 보았던 것이 내게 남은 이 극장의 마지막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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